이승훈(李昇薰)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자 평양으로 갔다가 민중이 자각해야 한다는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듣고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용동에 돌아와 신식교육을 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우고 산술(算術)·수신(修身)·역사·지리·체조 등을 가르쳤다. 이어 교육과 실업을 통해 실력양성을 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여 평북총관(平北總管)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오산학교를 열어 백이행(白彛行)이 교장이 되고 그는 학감이 되었다. 오산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 학생은 7명으로 여준(呂準)과 서진순(徐進淳)이 수신·역사·지리·산수·법제·경제·체조·훈련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후 이광수(李光洙)·이종성(李鍾聲)·조만식(曺晩植) 등이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찬무회(贊務會)를 조직하여 학교의 재정을 마련했다. 1909년 8월 안창호의 발의로 청년들의 수양과 애국심 함양을 위해 설립한 청년수양단체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1년간 거주제한의 형을 받고 제주도 유배 도중 105인사건이 일어나 많은 신민회 간부가 체포되자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 가출옥했다. 1917년 선천의 북교회(北敎會)에서 오산교회의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평북노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 9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7회 장로교 총회가 열렸을 때 상하이 교민 대표로 참가한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를 계기로 궐기하자는 논의를 했다. 12월 서춘(徐椿)·조만식 등과 더불어 국내 및 상하이·도쿄에서 각각 독립선언을 발표할 것을 논의했으며,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연락할 거점으로 교통사무소를 설치했다. 3·1 대한광복운동에는 기독교측 대표로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와 함께 광문사(光文社)의 설립 발기인으로 추대되었다. 1923년 이상재·유진태(兪鎭泰)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중앙상무위원으로 뽑혔으며,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했다. 1924년 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 등과 더불어 연정회(硏政會)의 조직에 대한 논의에 참가했으며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5개월 동안 경영을 맡았다. 조선기근구제회에 관여하는 한편,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시국 강연회에 참가하여 정치·교육·종교에 관한 강연을 했다. 1925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 대열에서 떨어져나와 참정권 획득과 자치론으로 기울어지자 오산학교로 돌아와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