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吳東振)은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에 적극 가담한 후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자 가족과 함께 간도 관뎬 현으로 망명하여 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광제청년단을 조직,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말경 변호사였던 안병찬(安秉瓚)과 함께 안둥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해 교육부원으로 중국 동삼성(東三省)과 국내를 왕래하며 대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 2월 대한청년단연합회·한족회·대한독립단 등의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산하단체인 광복군사령부가 조직되자 제2영장(營長)으로서 활동했다. 그해 9월 이탁(李鐸)과 함께 전투부대인 광복군총영을 조직하고 총영장에 임명된 후 한성에 중앙연종처(中央聯終處)를 두고 각 도에 지영(支營)을 설치해 일본관리의 일소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 7월 미국 국회의원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되자 독립에 대한 염원을 보여주기 위해 이탁·안병찬 등과 의논한 후 7월 상순경 안경신(安敬信) 등 3명은 평양, 정인복(鄭仁福) 등 2명은 신의주, 임용일(林龍一) 등 2명은 선천, 김영철(金榮哲) 등 3명은 한성으로 각각 파견했다. 한성 잠입조는 총독부 폭파를 계획하던 중 체포됨으로써 안경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원이 체포되었고, 오동진은 궐석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도 벽동·삭주·후창·초산·무산 등의 순사주재소와 관공서의 습격을 주도했다.1922년 양기탁(梁起鐸)과 협의하여 재만독립운동단체인 군정서·통군부·한교민단·대한독립단 등을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고 교통부장·재무부장·민사부장 등을 담당했으며, 1924년 군사부장 겸 사령장이 되어 남간도의 일본민회·보민회 등을 습격했다. 1924년 7월 양기탁(梁起鐸)·이청천(李靑天)·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관뎬 현에서 전만통일회의주비회를 개최하여 조직한 정의부(正義府)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생계부위원장을 맡았다. 1925년 정의부(正義府)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평안북도 초산경찰서의 추목주재소·외연주재소 및 벽동경찰서 여해주재소, 차련관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한편 친일파를 제거하고 6만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했다. 1926년 3월 현정경(玄正卿)·고활신(高豁信)·주진수(朱鎭壽)·김봉국(金鳳國) 등과 함께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지향하는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해 위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간도 한국인의 생활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7년 4월 1일 김동삼(金東三)·이탁(李鐸)·김기풍(金基豊) 등과 함께 길림성 대동공사(大東公司) 내에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