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申翼熙)는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1918년 말부터 최린·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3·1 대한광복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 비서장·법무총장·외무총장·문교부장 등을 지냈다. 내무부장 재임 중 8·15 대한 광복을 맞이해 귀국했으며, 귀국 후에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는 노선을 달리했으며, 정치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정치활동을 했다. 신익희는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 학장 등을 지냈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의 의원에 당선되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의 의장이 되었으며, 이청천(李靑天)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 합작,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