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孫秉熙)는 1910년 재정난에 빠진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을 원조하고 같은 해 12월 보성학원(普成學院)을 인수했으며, 1912년 12월 동덕여학교를 인수했으며 지방의 7, 8개교를 직접 관할했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기와 활자들을 구입해 가지고 들어와 한영호(韓榮浩)·최석창(崔錫彰)·민건식(閔建植) 등과 협력하여 주식회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고 출판사업을 했다. 1910년 초 새로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당국과 교섭하여 종교적 논설과 교도 상호간의 소식 등을 게재한다는 조건하에서 천도교 기관신문인 천도교 월보를 발행했다. 1910년 말에는 보성학원 소속 인쇄소 보성사를 창신사와 병합하여 보성사로 확대하고 천도교 월보 및 학교 교과서 등을 인쇄·간행했다. 손병희는 오세창·권동진 등과 독립운동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한편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린(崔麟)과 협의를 통해 독립운동의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 3개 원칙에 합의했다. 기독교·불교·천도교가 합작을 추진하여 3·1 대한광복운동을 준비했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1910년대 초부터 이종일이 천도교구국단을 조직하고 민중 봉기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건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병희는 폭력적 민중시위의 경우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있을 것이며 또 서구 문명국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하여 평화적인 3·1 대한광복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일본 경찰에 자진출두하여 검거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