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온동(廉溫東)은 1919년 3.1대한광복운동 당시에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4월에 상해로 건너가 전차감독(電車監督)으로 근무하면서 대한광복운동을 지원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1923년 4월에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돼 1927년 1월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했다. 1926년 7월 상해 3.1당에서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의 창립총회가 열려 임시정부를 유지·지원하기 위한 후원금을 확보하도록 했는데 이유필(李裕弼)·임필은(任弼殷)과 함께 회계검사원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1927년 3월 상해한인청년회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929년 남경에서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위해 민병길(閔丙吉)·윤기섭(尹琦燮)·성주식(成周寔)·신익희(申翼熙)·연병호(延秉昊)·최용덕(崔容德)·안재환(安載煥)·김홍일(金弘壹) 등과 함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조직했다. 산하에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해 단장에 안재환(安載煥)이 선출됐으며, 김창화(金昌華)·나월환(羅月煥)·이건호(李建浩)·이영희(李英熙)·최경수(崔景洙) 등이 활동하고 기관지로 우리길을 발간해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32년에는 당원이 약 40명 가량으로 늘어 상해와 남경 등에서 계속 활동했는데, 염온동은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 중견 간부로서 활약했으며 같은 해에 다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선출돼 1935년 11월까지 재직했다.1941년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韓國光復軍 總司令部) 부관처 관리과장으로 임명돼 근무했으며, 1944년 6월 5일부터는 임시정부 군무부 총무과장 겸 선전부 간사로 임명됐고, 동년 9월에는 군사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다가 1945년 3월부터 다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선출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