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상(金益相)은 북경으로 가서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했다. 일제 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처단하기로 계획하고 폭탄 2개와 권총 두 자루를 받아 1921년 9월 10일 북경을 떠나 동월 11일에 한성에 도착 다음날인 12일에 전기 수리공으로 가장해 총독부에 잠입, 폭탄 2개를 투척하였으나 1개는 불발되고 하나만 폭발했다.거사 직후 피신하여 평양에 수일간 체류하다가 북경으로 돌아간 그는 총독부 투탄 거사가 성과를 보지 못하자 재거사를 결심하고, 의열단장 김원봉과 상의한 후 1922년 2월 상해로 가서 동지 오성륜(吳成崙)과 함께 같은 달 28일 오후 3시 30분경 상해 세관 부두에서 필리핀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하는 일본 전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 義一) 육군대장을 향해 오성륜이 먼저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명중되지 않았고, 폭탄을 던지고 이어 육혈포를 연사했지만 안타깝게도 폭탄은 불발되고 탄환도 다나카에게 맞지 않았다. 중국 항무국(港務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일본영사관에 인도되었다가 일본 장기지방재판소(長岐地方裁判所)로 압송됐다. 동지 오성륜은 파옥,탈주했고, 김익상은 1922년 5월 5일 장기(長岐) 형무소로 압송됐다.1922년 5월 19일 개정된 장기지방재판소에서 재판장에게 일본 전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 義一) 육군대장을 향해 쏜 것이라고 대답했다. 장기(長岐)의 각 신문들은 그의 담대한 행동을 대서특필했고, 도처에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고 한다.지방재판소에서는 무기형이 언도되었으나 장기공소원(長岐控訴院)에서는 재판장 이삼(伊森)이 사형을 언도하자 의자를 들어 이삼을 치고 큰소리로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요, 조국 대한은 꼭 독립이 된다"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에 수감되었다. 장기형무소 편연지소에 수감 중 1924년 1월 무기형으로 감형되었으나 얼마후 옥중 순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