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李範晉)은 1887년 협판내무부사가 되었으며 일본의 침투에 맞서 미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명성황후가 친러정책을 표방하게 되자 농상공부 대신이 되었다. 1895년 7월 궁내부대신 서리가 되었으나 8월 20일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파면되었다. 그해 10월 친일정권에 포위되어 있던 고조 광무제를 궁궐 밖으로 피신시키고 친일정권을 타도하여 새 정권을 세우려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러시아 공사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듬해 비밀리에 귀국,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함께 2월 11일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등의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내각이 들어서자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이범진은 1897년 주미공사가 되고, 1900년 주러공사로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했다.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된 뒤 일제가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고 고조 광무제의 특사 명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국권 회복에 힘썼다. 1907년 6월 고조 광무제의 특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만나 회의에 보내는 장서(長書)를 번역했다. 아들 이위종(李瑋鍾)도 특사의 일원이자 통역관으로 함께 헤이그로 떠났다. 1909년 11월에 있을 만국평화회의에서 다시 활동하기 위해 2번째의 평화회의 특사 파견 운동을 계획하여 중심 연락을 맡았다. 1910년 8월 경술늑약이 늑결되자 권총으로 자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