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종(李瑋鍾)은 외국공관장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을 순회하여 외국어에 능통했다. 아버지가 주 러시아 공사가 되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 주재 한국공사관이 폐쇄되었으나 아버지 이범진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면서 외교활동을 했다.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조 광무제는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3명의 특사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정사 이상설(李相卨)과 부사 이준(李儁)이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장서(長書)를 번역했다.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펴보았으나 희망이 없자 6월 19일 그곳을 출발, 독일의 베를린에서 장서를 인쇄하고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서 장서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를 프랑스어로 만들어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국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고, 각국의 대표위원들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그러나 이러한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특히 영국인 스테드가 회장으로 있는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그 회보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7월 9일에는 국제협회의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연설할 기회를 얻자 이위종은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된 경위와 일본의 침략상을 낱낱이 지적하여 폭로·규탄하고, 한국민과 고조 광무제는 독립을 열망하고 있으니 세계는 한국 독립에 협조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의 열정적인 호소는 각국 언론인은 물론 만국평화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감명을 주었다.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권업회(勸業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