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화영(吳華英)은 1919년 2월 17일 박희도(朴熙道)를 만나 기독교의 독립운동 참여를 논의하고 이튿날 박희도·이승훈(李昇薰) 등을 만나 기독교에서도 일본 정부와 총독부에 청원서를 내고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여, 개성지방의 책임을 맡았다. 2월 27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다음날 인쇄된 독립선언서 500여 장을 개성의 강조원(姜助遠)과 원산의 곽명리(郭明理)에게 전달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泰和館)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한용운(韓龍雲)의 간단한 식사를 듣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복역중이던 1920년 부인 이명희(李明姬)도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고 독립신문을 배포한 대한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신앙부흥운동과 민족정신 함양에 힘썼다. 1923년 1월 유진태(兪鎭泰)·이종린(李鍾麟)·백관수(白寬洙)·정노식(鄭魯湜) 등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발기준비회에 참여하여, 2월 3일 천도교당에서 물산장려에 관한 대중강연을 했다. 1926년 11월 명제세(明濟世)·최익환(崔益煥)·권태석(權泰錫) 등이 발기한 민족단일전선 조직인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창립준비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1927년 2월 15일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참여하여 간사로 선임되었다. 1929년에는 11.3 대한광복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9년 항일비밀결사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다. 1945년 8월 대한 광복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