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후 국가최고회의기관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권한이 너무 강대하므로 태조는 도평의사사의 병권(兵權)을 분리하여 삼군부를 설치하고 태조가 가장 신임하는 정도전(鄭道傳)을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에 임명하여 병권을 맡기고 한양 천도 후 경복궁을 창건하고 광화문 앞 동쪽 첫머리에 문직 최고기관인 도평의사사를 짓고, 서쪽 첫머리에 삼군부를 지었다. 태종 대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議政府)로 개칭하고 삼군부를 폐지하자, 도평의사사 건물을 의정부가 그대로 사용하고, 삼군부의 건물을 예조가 사용하였다.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은 1864년 2월 비변사(備邊司)의 권한을 줄이기 위하여 비변사를 의정부(議政府)와 비변사로 나누어 비변사는 국방과 치안만 관장하게 하였고 1865년 3월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이것을 의정부(議政府)에 합하였다가 1865년 5월 다시 군(軍) · 정(政)을 분리하여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였다. 삼군부(三軍府)를 복설(復設)하자 국초(國初)와 같이 예조 청사를 삼군부 청사로 삼고, 예조는 광화문 앞 동쪽 이조와 호조 중간에 있던 한성부(漢城府)로 옮기고 한성부는 훈국신영(訓局新營)으로 옮겼다. 삼군부의 직제는 영삼군부사(領三軍府
도성의 서산인 인왕산(仁王山)은 그 산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앉은 만큼 그 산록을 따라 도성 안 곳곳에 아늑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가 펼쳐져 있으며 조선 전기에 인왕산 동록(仁王山 東麓)에 인왕사(仁王寺), 내불당(內佛堂), 금강굴(金剛窟),복세암(福世庵) 등의 여러 사찰이 자리잡고 있었다.인왕산 북록(北麓)에는 청풍동(淸風洞) · 백운동(白雲洞)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며, 남쪽으로 옥류동(玉流洞) · 인왕동(仁王洞) · 누각동(樓閣洞) · 수성동(水聲洞)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이 많다. 인왕산(仁王山) 남쪽으로 내려오면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살던 필운대(弼雲臺)를 중심으로 하여 필운동(弼雲洞)의 황학정(黃鶴亭),사직단(社稷壇) 부근의 대송정(大松亭) 및 옥류동(玉流洞)의 등용정(登龍亭),누각동(樓閣洞)의 백호정(白虎亭) · 풍소정(風嘯亭) 등 사정(射亭)이 있어 유명하였다. 또 그 남쪽으로는 왕가의 길지(吉地)라고 하여 일찍이 광조 대에 경희궁(慶熙宮), 인경궁(仁慶宮),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거처하는 자수궁(慈壽宮) 등 새 궁궐의 창건이 이루어졌다. 인왕산록(仁王山麓) 중에서 제일 유수한 계곡에 위치한 옥류천
선농단(先農壇)은 농사짓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쳤다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태조 대에 이미 적전령(籍田令)·적전승(籍田丞)을 두어 왕의 농경 시범과 치제의 의례를 관장케 하였다. 서적전(西籍田)은 개성부 동쪽 20리에 있었으며 동적전(東籍田)은 한성부 동교 10리에 있었으며 이를 전농(典農)이라 했으며, 태종 6년(1406) 적전단(籍田壇)을 보수하고 수호하는 인정(人丁)을 두었다. 흥인지문 밖 선농단은 성종 7년(1476)에 쌓았으며, 임금이 친히 경작하여 그 수확으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제사지내던 토지인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경칩(驚蟄) 뒤의 첫 번째 해일(亥日)에 제사를 지낸 뒤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 기록되어 있다. 선잠단(先蠶壇)은 중국 상고 황제(皇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누에신(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조선 성종 2년(1471)에 처음 쌓고 뽕나무를 심어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왕비는 궁중 안에 단을 꾸며 내명부ㆍ외명부들을 거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 의식을 행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태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고, 태조 4년(1395) 정월부터 공사를 착수하였다. 사직에 올리는 중요한 제사는 4대향(四大享)이라 하여 풍년을 빌기 위해 정월 상순 신일(辛日)에 지내는 제사인 기곡(祈穀), 2월과 8월의 상순 무일(戊日)에 행하는 중삭(中朔), 동지 뒤의 셋째 술일(戌日 또는 未日)인 납일(臘日)에 한 해 동안 지은 농사 형편을 신에게 고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인 납향(臘享)이 있었고 홍수나 한파, 유행병과 전쟁에 행하는 기제(祈祭)·책봉(冊封)·관례(冠禮)와 혼례(婚禮)에 행하는 고제(告祭)의 소사(小祀) 등이 있었다. 사직단(社稷壇) 주변에 동ㆍ서ㆍ북쪽 산기슭을 따라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신실 등은 모두 불타버려 선조 말년에 수복(修復)되었고 신문(神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단(社壇)은 동
수표(水標)는 청계천의 물의 높이를 측정하기 위해 6각 방추형 돌로 만든 하천 수위계(水位計)이다. 조선 세종 대에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강우량을 측정하고 청계천과 한강에 수표를 설치하여 수위를 재도록 하였다. 세종 대의 한강변의 것은 바윗돌에 직접 눈금을 새긴 것이고, 청계천의 것은 마전교(馬廛橋) 서쪽에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청계천의 수표는 성종 대에 화강암 사각기둥에 눈금을 새겨 계량한 것이며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올려져 있고 아래에 직육면체의 초석이 땅 속 깊이 박혀 있다. 수표석(水標石) 아래에는 ‘계사경준(癸巳更濬)’, 또 초석에는 ‘기사대준(己巳大濬)’이라고 청계천(淸溪川) 바닥을 걷어낼 때 바닥까지 흙을 쳐냈음을 밝히는 기록을 음각했으며 현재의 수표는 그 상한이 성종 대가 되고, 그 하한이 기사년 즉 영조 25년(1749)이 된다. 돌기둥 양면에는 1척에서 10척까지 1척(21.5㎝)마다 눈금을 새기고, 3․6․9척에는 O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라고 표시하였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 수위(水位)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보아
정업원(淨業院)은 조선 6대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살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태묘(太廟)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단종 원년(1453) 간택되어 이듬해에 왕비에 책봉(冊封)되었다. 단종 3년(1455) 6월 숙부인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함에 따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에 봉해졌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들의 단종 복위(復位)운동으로 세조 3년(1457)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나이 18세로 흥인지문 밖에서 눈물로 이별하고 영월 쪽을 바라볼 수 있는 정업원(淨業院)에 작은 초가를 짓고 3명의 시녀를 데리고 거처하였다.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암자 동쪽에 솟아 있는 동망봉(東望峰)에 올라가서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머리를 깎은 송씨는 세 시녀와 함께 초가인 정업원(淨業院)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82세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
함춘원(含春苑)은 창경궁(昌慶宮) 동쪽에 있는 후원(後苑)이며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창건하면서 풍수지리설에 의해 궁궐 동편의 지세를 보강하기 위하여 나무를 심고 담을 둘러 출입을 금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었고 성종 24년(1493) 2월 함춘원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져 창경궁 후원(後苑)이 되었다. 연조 대에는 함춘원 담장 밖 민가를 철거하여 확장하고, 기묘한 화초를 심어 더욱 심원하고 엄숙하게 하였다. 담 밖에는 별정군(別定軍)을 배치하여 통행을 금하고, 대문과 함께 함춘원 북쪽에 성을 쌓았다. 영조 40년(1764)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이 곳에 옮겨 지었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으로 고쳐 불렀는데 정조가 친히 편액(扁額)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日瞻),월근(月覲)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昌慶宮)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9년(1785) 8월 경모궁(景慕宮)과 사도세자의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 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헌종 5년(1839) 12월 봉안각(奉安閣)이 소실되었으나 곧 중건되었다. 광무 3년(1899) 8월 사도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철종 12년(1861)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22첩으로 구성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의 전국지도이다. 우리 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22층을 만들고,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한면으로 했는데, 축척은 16만분의 1로서 각 층마다 20.1cm 크기의 8폭으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면이 한판으로 구성되어 각 층의 판을 병풍식으로 접어 첩으로 만들고 펴면 1장의 지도가 되도록 제작되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지지(地志)에 기초하여 풍부하고 상세한 정보를 수록하였으며 조선 후기 지도 발달의 성과를 종합한 것이다. 지도 첫머리인 1층에는 좌표와 지도표(地圖標), 지도유설(地圖類說), 도성도(都城圖), 경조5부도(京兆五部圖) 등이 실려 있다. 좌표에 방안(方眼)을 그리고, 매방십리(每方十里)라 표시하였으며, 읍과 읍 사이의 도로에 10리마다 눈금을 표시하여 거리의 축척을 알기 쉽도록 하였다. 지도유설(地圖類說)에는 지도 제작의 경위와 지도의 중요성, 지도의 도법, 지도의 실용가치 등에 대하여 서술하고 전국 해안선의 길이와 6대 간선도로의 총길이를 기록하였고대동지지(大東地志)를 별도로 저술하여 지도와 같이 이용할
목멱산(木覓山) 봉수대(烽燧臺)는 경봉수(京烽燧)라고 하며, 조선시대 전국의 봉수(烽燧)를 매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하는 중앙 봉수소였다. 조선 세종 대에 봉수제는 크게 정비되고 발전된 체제를 갖추었으며 조선의 봉수(烽燧)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인 목멱산(남산)의 경봉수(京烽燧), 해륙․변경의 l선에 위치하여 연대라고 호칭된 연변봉수(沿邊烽燧),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되며, 기간 선로상의 직선봉수(直線烽燧)와 그 보조선상의 간선봉수(間線烽燧)으로 구분한다. 봉수(烽燧)는 중앙의 경우는 병조(兵曹)의 무비사(武備司)가, 지방의 경우는 관찰사(觀察使), 수령(守令)과 병사(兵使),수사(水使),도절제사(都節制使),순찰사(巡察使) 등의 군사책임자가 그 임무를 맡았다. 봉수는 동서남북의 어느 변경에 위치한 봉수대(烽燧臺)에서 올린 봉화 (烽火)이든 12시간이면 한성에 도착하였지만 봉수군의 태만,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불거(不擧),불통되거나 전달 소요시간이 지연되는 경우도 많았다. 봉수대에서는 올리는 횃불의 수로 정세의 느리고 급함을 나타냈는데, 평상시에는 1거(炬), 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국경에 나타나
별궁(別宮)은 광조가 창건한 인경궁(仁慶宮)이 있는데 풍수승(風水僧) 성지(性智)에 의하여 인왕산(仁王山) 왕기설(王氣說)이 제기되어 광조는 인왕산의 왕기를 누르기 위해 1616년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했다. 필운동,누하동에 있었던 인경궁은 경희궁의 영건과 병행하였고 인조 10년 인목대비가 인경궁 흠명전(欽明殿)에서 서거하였으며 인조 26년 인경궁의 재와(材瓦)로 홍제원(弘濟院)을 지었고 선왕(先王)의 후궁(後宮)들이 거처하는 자수궁(慈壽宮)은 옥인동에 있었다. 안동궁(安洞宮)은 흥선헌의대원왕이 고조의 비(妃)인 명성황후를 맞아들이기 위해 신축한 별궁(別宮)으로 안국동에 있고 영조의 잠저(潛邸) 창의궁(彰義宮)은 통의동에 있었으며 숙종 45년 경의군(敬義君)이 탄생한 곳으로 궁 안 장보각(藏譜閣)에 영조의 영정을 봉안했다.예종(睿宗)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사저 수진궁(壽進宮)과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의 용동궁(龍洞宮)은 수송동에 있다. 장의동본궁(壯義洞本宮)은 태종,세종의 잠저(潛邸)로 통인동에 있었으며 어의궁(於義宮)은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사직동에 있던 잠저(潛邸)이며 용흥궁(龍興宮)은 효제동에 있던 효종의 잠저(潛邸)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