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1895년 경복궁을 습격해 고조 광무제와 대신들을 연금하고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전대미문의 만행을 저지르자 고조 광무제는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조 광무제는 1897년 2월 외국 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했다. 수옥헌(漱玉軒)은 1901년 지은 서양 건축양식의 황실도서관이며 1904년 경운궁에 화재가 일어나자 고조 광무제는 경운궁의 함녕전에서 중명전(重明殿)으로 거처를 옮겼고 1907년 7월 일제의 강요로 황제위에서 물러날 때까지 국사를 처리했으며 일제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위임하는 불법 무효한 을사늑약을 강제했다. 을사늑약 이후 외교권을 잃은 대한제국은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제의 강박에 의한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알릴 기회라 판단한 고조 광무제가 1907년 4월 중명전을 찾은 이준에게 러시아 황제에게 회의 참석을 주선해달라는 내용이 적힌 친서를 전달했다. 대한황실역사관은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편전 겸 침전으로 건립된 서양식 근대건축물이며 대한
1894년(고조 31) 7월 갑오개혁으로 관료의 등급이 1품에서 9품까지 정(正)·종(從)을 합하여 18품급(品級)이던 것을 1·2품에 정(正)·종(從)을 두고 3품에서 9품까지는 없애 11개의 품급으로 축소하였다. 1품에서 9품까지를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으로 3대별하였으며 정1품에서 종2품까지를 칙임관(勅任官)이라 하였다. 왕손(王孫)·총리대신(總理大臣)·종친(宗親)은 정1품, 각 아문대신(衙門大臣)과 의정부 좌우찬성(左右贊成)은 종1품, 도찰원 도헌(都察院都憲)과 궁내부 및 각 아문(衙門) 협판(協辦), 경무사(警務使) 등은 정2품 내지 종2품으로 각각 보(補)하였으며, 이들을 칙임관(勅任官)이라 하였고 무관은 대장(大將)·부장(副將)·참장(參將) 등 장관급(將官級)이 칙임관(勅任官)이었다. 칙임관(勅任官)의 임명 절차는 중앙관은 총리대신(總理大臣)이 각 아문대신(衙門大臣), 의정부 좌우찬성(左右贊成), 도헌(都憲)과 만나서 협의, 후보자를 3배수로 천거(薦擧)하면 국왕이 이 중에서 임명하였다. 지방관은 총리대신(總理大臣)이 각 아문 대신 및 협판(協辦)·도헌(都憲)과 협의하여 후보자를 2배수 천거하면 국왕이 임명하였다. 189
일본공사관은 1880년 11월 16일 돈의문(敦義門) 밖 청수장(淸水莊)을 이용하였으나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불타버렸고 일본공사관은 1882년 8월 16일부터 1884년 4월 16일까지 왜성대(倭城臺)에 있었다. 1884년 4월 17일 교동(校洞)의 박영효(朴泳孝) 저택(邸宅)을 임시 사용하였고 1884년 11월 3일 신축한 교동의 공사관 건물은 1884년 12월 7일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소실(燒失)되었으며 1885년 1월 3일 경기감영(京畿監營) 선화당(宣化堂)에서 잠시 머물다가, 1885년 1월 12일 남산 왜성대(倭城臺)로 옮겼다. 미국공사관은 1883년 5월 정동(貞洞)에 세워졌으며 1882년 5월 22일 (美國)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883년 5월 19일 그 비준서를 교환하면서부터 한성의 정동에 공사관(公使館)이 설립되었다. 청국공사관은 1883년 10월 23일부터 충무로에 설치되었고, 상무총판(商務總辦) 진수상(陳樹裳)이 수장(首長)으로 있었으며 1885년 11월 원세개(袁世凱)가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관명(官名)으로 부임했고, 공사관(公使館)의 명칭이 청국이사부(淸國理事府)로 변했다. 영국공사관은 1
흥선헌의대원왕이 병인(1866)년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 선교사 9명을 비롯한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중국 톈진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의 천주교도 학살을 알렸으며 보고를 받은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는 한반도 진격을 표명하였고 흥선헌의대원왕은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변경(邊境)의 수비를 굳게 했다. 9월 18일 로즈 제독의 프랑스 군함 3척은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楊花津)을 통과하여 서강(西江)에까지 이르렀고 조선 정부는 어영중군(御營中軍) 이용희(李容熙)에게 표하군(標下軍) ·훈국마보군(訓局馬步軍)을 거느려 경인 연안을 엄중 경비하도록 했다. 10월 로즈 제독은 함대 7척과 600명의 해병대를 이끌고 부평부(富平府) 물치도(勿淄島)에 나타났다. 10월 14일 이 중 4척 함정과 해병대가 강화부(江華府) 갑곶진(甲串津) 진해문(鎭海門) 부근의 고지를 점거하였으며 프랑스군은 한강수로의 봉쇄를 선언하고, 16일 전군이 강화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무기 ·서적 등을 약탈했다. 10월 26일 프랑스군 약 120명은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정찰하려다
조선시대 한성(漢城) 5부(五部) 내의 포도(捕盜),순라(巡邏) 등 치안(治安) 업무에 중심 역할을 하였던 기관은 좌포도청(左捕盜廳) · 우포도청(右捕盜廳)이었다.우포도청(右捕盜廳)은 혜정교(惠政橋)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좌포도청(左捕盜廳)은 파자교(把子橋)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한성(漢城) 5부(五部)의 치안 업무를 담당하였다. 1894년 7월 14일 설치한 경무청(警務廳)의 책임자 경무사(警務使)는 내무대신의 지시를 받아서 한성(漢城) 5부(五部) 내의 경찰 업무와 감금 업무(監禁 業務)를 수행하되 범죄의 경중을 구분하여 법사(法司)로 이송(移送)하는 모든 일을 관장하였고 한성 5부(五部)에 경찰지서(警察支署)를 두었으나 1895년 경무지서를 경무서(警務署)로 하였다. 경무서의 서장은 경찰 사무를 관장하여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관할구역 내를 순시하며 민정 시찰과 부하의 사무 집행을 감독하고 부하직원에게 상부 명령과 경무 법규를 주지시키고 주무관(主務官) · 군(郡) · 읍(邑) · 동장(洞長) 및 기타 관계 관청과 문서 왕복을 할 수 있으며 서장이 유고시에는 수석 총순(首席 總巡)이 서장을 대리하였다. 총순(總巡)은 순검의 행의(行儀)와 복장을
황감제(黃柑製)는 해마다 동짓달이나 섣달에 제주 목사(牧使)가 귤 · 유자 · 감 따위의 특산물을 진상(進上)하면 그 일부를 성균관(成均館)과 4학(四學)의 유생(儒生)들에게 나누어 준 뒤 어제(御題)를 내려 고시(考試)하여 거수자(擧手者)에게 급제(及第)를 준 것인데 1564년(명종 19)부터 시행되었다.그 고시절차를 보면 대제학(大提學)이 패초(牌招)를 받고 입궐하여 시제(試題)를 적어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는다. 대제학(大提學)은 승지 및 중사(中使)와 함께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으로 가는데 승지(承旨)는 어제(御題), 중사(中使)는 귤을 가져간다. 명륜당(明倫堂)에 도착하면 어제(御題)는 북벽의 서안(書案) 위에, 귤은 상 위에 봉치(封置)한다. 중사는 동벽의 수좌(首座)에 앉고 승지는 그 다음에 앉으며, 대제학과 본관 당상관(堂上官)들은 중사 및 승지와 서로 읍례(揖禮)한 뒤에 서벽에 앉는다. 대제학이 무릎을 꿇고 승지 앞에 나아가 어제를 받아 제자리에 돌아가 앉는다. 대제학 · 본관 당상관 · 중사 및 승지에게 귤 5개씩, 제 낭청(郞廳)에게 2개씩을 나누어 주고 양재(兩齋) 재임(齋任)과 거재(居齋) 유생에게 1개씩, 방외 유생에게는 한 개를
시험 결과에 대한 전형(銓衡)이 끝나면 소과(小科) 급제자(及第者)의 성명을 성적순으로 써서 국왕에게 입계(入啓)하는 동시에 급제자(及第者)의 명단을 발표하는 괘방(掛榜)을 하고, 길일(吉日)을 택하여 전정(殿庭)에서 창방의(唱榜儀) 또는 방방의(放榜儀)라 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시신(侍臣)과 사관(四館)의 참하관(參下官)들이 시립(侍立)한 가운데 거행되었고 생원(生員)은 동정(東庭), 진사(進士)는 서정(西庭)에 정열하여 국왕에게 사배례(四拜禮)를 올린 뒤 소과(小科)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받았다. 소과(小科) 급제한 생진사도 문과 급제와 같이 어사화를 꽂은 급제자들이 말을 타고 천동 (天童)을 앞세워 악수(樂手)가 음악을 울리며, 광대가 춤을 추고 재인(才人)이 온갖 재주를 부리면서 3 - 5일 동안 시가를 행진하는 유가(遊街)를 하였다. 생진사들은 생원(生員)의 장원집에 모여 그 인솔 아래 대궐에 들어가 국왕에게 사은(謝恩)하고, 다음날에 진사(進士)의 장원집에 모여 그 인솔 아래 문묘(文廟)에 가서 알성(謁聖)하였으며 문희연(聞喜宴)이라 하여 친척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시관(試官)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었다. 동방자(同榜
4학(四學)은 동(東) · 서(西) · 남(南) · 중학(中學)의 총칭으로서 조선 초기에는 4부학당(四部學堂)이라 하였다. 동(東) · 서(西) · 남(南) · 중부유학(中部儒學)으로도 불리우다가 세조 12년(1466)의 관제(官制) 개혁 때 동 · 서 · 남 · 중학으로 개칭되었다. 태종 5년(1405) 한양으로 천도하고 국가의 지도이념인 유학의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동 · 서학당 외에 남부학당(南部學堂)이 태종 11년(1411) 6월에 설치되었고 그 해 10월 4부학당 중에서 최초로 남부학당의 독립적인 학사(學舍)가 한성부 남부(南部) 성명방(誠明坊)에 건립되었다.세종 4년(1422) 12월 중부학당의 독립 학사가 한성부 북부(北部) 관광방(觀光坊)에 신축되었다. 서부학당(西部學堂)은 처음에는 한성부(漢城府) 북쪽에 편재해 있던 경고(京庫)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생도들의 아침 · 저녁 왕래가 크게 불편하였기 때문에 세종 17년(1435)에 이르러 한성부(漢城府)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독립 학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불사(佛寺)를 이용하고 있었던 동부학당(東部學堂)은 세종 17년(1435) 8월 경술(庚戌)에 동부학당을 보수하도록 명한 것으로 보아 그
세종은 수시력(授時曆) 시행 이후 그 계산법을 알지 못하여 빼놓았던 일월교식(日月交食)과 오성(五星)을 추보(推步)하여 보완케 했고, 세종 15년(1433) 정인지(鄭麟趾), 정초(鄭招), 정흠지(鄭欽之), 김담(金淡), 이순지(李純之) 등의 학자들에게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도록 했다.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은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통궤(大統曆通軌)를 바탕으로 하여 오차를 교정하여 역일(曆日), 태양(太陽), 태음(太陰), 중성(中星), 교식(交食), 오성(五星), 사여성(四餘星)의 칠정(七政)과 천행제율(天行諸率), 일행제율(日行諸率), 월행제율(月行諸率), 일월식(日月食)의 한도 등에 대하여 서술했는데, 세종 24년(1442)에 완성되어 세종 26년(1444)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은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 편찬된 뒤 회회역경통경(回回曆經通經)과 가령역서(假令曆書)를 개정 · 증보하였으며 그 내용은 태양(太陽), 태음(太陰), 교식(交食), 오성(五星), 태음오성릉범(太陰五星凌犯) 등으로 나뉘어져 내편(內篇)의 칠정(七政)과 다른 것으로, 내편(內篇)은 2권 2책이었으나 외편(外篇)은 3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달력은 한성의
서원(書院)은 명목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선현을 제사지낸다는 설립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지방 사족(士族)의 지위를 강화해 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사화(士禍)로 말미암아 향촌에 은거하여 생활하던 사림(士林)의 활동 기반이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급속히 발전하였다.서원(書院)은 유학의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 또는 사묘(祠廟)의 역할, 향약(鄕約) 등의 향촌 질서를 정하고 백성들을 계도하는 역할, 단순한 교육이 아닌 학문 연구와 발전의 기능을 하는 연구소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향촌의 사림(士林)을 결집하는 역할도 하였다.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었고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서원이 생겼으며, 1550년(명종 5년)에는 퇴계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책·노비·전결(田結) 등을 주어 장려하였으며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어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대에는 1백 24개, 숙종 대에는 1도에 80 ~ 90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