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南慈賢)은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간도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동삼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으로 간도 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게 되었다.편강렬, 양기탁, 손일민 등이 간도 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할 때 참가했으며, 무장 투쟁이나 테러 위주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참여했다. 1922년에 참의부의 채찬과 함께, 1926년에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목적으로 박청산, 이청수와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1928년 간도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 등 47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석방 운동에 힘써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다. 1931년 김동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였다.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영국인 리튼이 이끄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손가락을 잘라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보냈다.1933년 주만 일본대사이며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의 암살 계획을 세우고 하얼빈에서 변장한 채 정탐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김하락(金河洛)은 1895년 11월 단발령이 내리자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민승천(閔承天) 휘하의 도지휘(都指揮)가 되어 광주(廣州)·이천·안성·연천 등지에서 을미독립운동을 했다. 11월 17일 광주 노루목전투에서 일본군 100여 명을 죽이고 무기와 군량을 다수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광주·이천을 중심으로 의병들을 전투훈련시키는 한편,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여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1896년 2월 이현(梨縣)에서 적군과 교전했으나 패했다. 군사를 재수습하고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총병력 3기 9대를 인솔하는 의병장이 되었다. 5월 의흥군(義興郡)을 점령했고, 청송(靑松)과 비봉산(飛鳳山) 전투에서 토벌군을 격퇴했다. 6월에는 광주 인자점(仁疵店)에서 군비를 재정비하여 광주성을 공격·점령했다. 7월 청하(淸河)·청송의 의병과 영덕 의병장 신돌석(申乭石), 안동 의병장 류시연(柳時淵)과 함께 적과 싸우다 양쪽 어깨에 총탄을 맞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김지섭(金祉燮)은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김원봉(金元鳳)·곽재기(郭在驥)·김시현(金始顯) 등과 조국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짐하고,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 간도·상하이·시베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1922년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상하이·베이징에서 활동했다. 같은 해 11월 장건상(張建相)과 함께 러시아로부터 선전비를 받아 독립운동자금에 충당하고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했으며 이어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했다. 그 뒤 국내에서의 파괴 공작과 테러 활동에 주력했다. 1923년 3월 폭탄 30여 개를 상하이에서 국내로 보내기 위하여 안둥현에 중개소를 설치하고 김시현·유석현(劉錫鉉)·황옥(黃鈺) 등으로 하여금 한성으로 반입케 하여, 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찰서와 매일신보 등을 파괴하려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실패했다. 1924년 초 도쿄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 일본의 총리대신과 총독을 비롯한 일본 고관들이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 대학살에 대한 보복으로 이들을 저격하기 위하여 도쿄에 잠입했다. 그러나 의회가 무기 연기되는 바람에 계획을 변
김성수(金性洙)는 1915년 4월 운영난에 시달리던 중앙학교(中央學校)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전력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에는 경성방직회사(京城紡織會社)를 창립하여 민족자본 육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듬해 4월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형성하기 시작한 민족주의를 육성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민족의 대변지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계몽에 힘썼으며 일제의 언론 탄압으로 동아일보사가 사원들의 월급도 지불하지 못하는 경영난에 빠졌을 때 사재(私財)를 털어 어려움을 극복하기도 했다. 1922년 동아일보를 통해 전개한 물산장려운동과 1923년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 등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으며, 1932년 3월 교육구국의 이념으로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인수하여 일제에 맞섰다. 1935년부터 8·15 대한 광복이 되기까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우리 문화재의 일본 유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학교 도서관에 비장할 고서(古書)와 박물관에 진열할 골동품 수집에 전력을 다했다. 1945년 9월 16일 천도교회관에서 송진우와 함께 우익세력의 정당인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당했
김경천(金敬天)은 1919년 2·8 대한광복선언을 계기로 귀국해 6월 초 이청천과 함께 간도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현역 일본군 장교인 김경천의 가세는 무장 독립 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1919년 말 경에 김경천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 총사령관으로서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1년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한국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말에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연해주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김경천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2년 이후로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
구춘선(具春先)은 1903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사포대를 조직하여 한국인의 보호에 나서자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에 보호소와 병영을 설치하고 간도에 살고있는 한국인 보호에 진력하였다. 1905년 이범윤이 연해주로 망명한 후 한인보호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용정촌으로 거점을 옮겼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이 전개되자 3월 13일 길림성 용정에서도 한성에서의 독립선언에 대한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3월 13일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인사들이 대부분 참석한 가운데 독립운동을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조선독립의사회가 조선독립기성총회로 개편되어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이익찬·윤희준·방달성 등과 함께 용정에서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조선독립기성총회는 그 명칭을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으며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2월 연해주 방면으로부터 군총을 입수하여 독립군의 무력을 강화하였다. 같은 해 10월 29일 간도에 있는 간북대한의민회, 대한신민단, 대한광복단, 대한국민회 등이 병합하여 임시정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총판부(總辦部)를 결성하였을 때 연길(
한용운(韓龍雲)은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때 태화관(泰和館)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인 1922~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한용운은 여성해방운동과 농민·노동 운동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불교의 자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 법려 비밀 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신채호의 묘비 건립과 정약용 서세 100년 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40년 창씨개명(創氏改名)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최익현(崔益鉉)은 1868년 10월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聚斂政策)의 혁파, 당백전(當百錢)의 폐지, 사대문(四大門) 문세(門稅)의 폐지 등을 주장하며 흥선헌의대원왕을 비판했다. 1873년 11월 상소하여 만동묘(萬東廟)의 철폐를 비롯한 흥선헌의대원왕의 실정을 통박하고, 하야를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10년간 집권해온 흥선헌의대원왕이 물러나고 고조 광무제가 친정을 하게 되었다. 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이 추진되자 일본과의 강화(講和)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무한한 탐욕을 당해낼 수 없고 일본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양인(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이유로 궁궐 앞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1894년 6월 경복궁 쿠데타가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친일 개화파 정권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개화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했으며,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의 처단과 역적들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를 요구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
조만식(曺晩植)은 1913년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취임했다. 이후 오산학교 교감을 거쳐 1915년 교장이 되었고, 1919년 2월 3·1 대한광복운동을 위해 교장직을 사임하기까지 무보수로 민족교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1월 만기를 1개월 앞두고 가출옥했다. 그해 10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가 교장 취임을 승인하지 않아 1년 만인 1921년 4월 사임했다. 같은 해 5월에 숭실전문학교 강사로 2년간 봉직하는 동시에 평양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취임해 1932년까지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 오윤선과 함께 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했다. 1923년 김성수·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해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했고, 1925년 4월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지만 1년 만에 6·10 대한광복운동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1926년 9월 평양의 숭인중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일제측의 교장 승인 거부로 192
임병직(林炳稷)은 1913년 이승만(李承晩)의 소개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여 편집장을 맡았다. 이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설립한 한인중앙학원·한인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했다. 1919년 국내에서의 3·1 대한광복운동 소식이 3월 중순 현순(玄楯)의 보고에 의해 미국 각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하자,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이승만·서재필(徐載弼)·조병옥(趙炳玉)·장기영(張基永)·김현철(金顯哲)·류일한(柳一韓) 등 150여 명의 재미교포·유학생들과 함께 한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의 앙양과 미국 여론을 환기시킬 목적으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여 서기장(書記長)으로 활약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근무하면서 대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했다. 1920년초 이승만을 수행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갔다. 1921년초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黃鎭南)과 파리·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 각국에 일본 침략의 만행과 대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재미한족연합회가 구성되자, 김호(金乎)·한시대(韓始大)·김병연(金炳淵)·송철(宋喆) 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