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순(崔碩淳)은 1919년 남간도의 의병계열 독립군 단체인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집서(輯西)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8월 남간도 독립군 단체의 통일조직인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의용군 2중대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1924년 4월에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동단결을 해야 한다는 선언서에 남만 군인대표 78명과 함께 서명하였으며, 5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가 결성되자 참의부 의용군 2중대장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참의부 최고 지도자인 참의장의 역할을 겸임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지휘하는 등 혁혁한 활동을 벌였다. 참의부는 1924년 5월 19일 압록강 일대를 순시 중이던 사이토 총독을 기습 공격하여 국경지대의 안정을 대내외에 선전하려던 총독부의 계획을 무력화시켰다. 일제는 남간도지역의 독립군 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계획하여 실행하였다. 1925년 2월 참의부(參議府) 참의장(參議長) 겸 2중대장으로 국내 진공작전과 군자금 모집, 일제 기관 파괴 등의 안건으로 참의부 소속의 5개 중대 군사회의를 집안현 고마령(高馬嶺)에서 주재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제의 초산경찰서 경찰대 65명은
최용신(崔容信)은 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여 본격적으로 YWCA의 농촌계몽 사업에 참가했다. 1929년부터는 황해도 수안과 경북 포항 등지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1931년 10월 YWCA 농촌지도원으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샘골)에 파견된 최용신은 예배당을 빌려 강습소를 개설하고 아동과 청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에 힘을 기울였다. 생활 개선과 농가 부업 장려를 위한 부녀회와 청년회를 조직하여 주민들 상호간에 신뢰감을 조성하는 데도 앞장섰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는 등 어려움은 많았지만 굳은 노력으로 1932년 5월 강습소는 정식인가를 받았으며, 천곡학원(샘골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유지들 및 YWCA의 보조로 1933년 1월 낙성식을 거행했다. 보다 장기적이고 실천적인 농촌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34년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충족시키고자 일본에 건너가 3월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하여 뒤늦게 향학열을 불태웠으나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했다. 9월 귀국과 동시에 YMCA 보조금 중단으로 운영난에 빠진 천곡학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명하(李命夏)는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늑약이 강제 늑결되어 국권이 위협받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과감히 관직을 버리고 쓰러져가는 국권을 바로 잡고,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류인석의 문하로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하여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군경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친일관리들을 숙청하여 민족의 기를 드높였다.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1907년 말 13도창의군을 결성하여 한성진공작전을 전개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강년 의병장의 지시로 각지로 다니며 의병운동의 재기를 촉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 경술늑약이 늑결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진룡 의병장과 함께 무장투쟁을 계속하여 갔다. 국내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 일대의 의병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단을 창단하고, 무장대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대한독립단 무장대(武裝隊)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의주(義州)·철산(鐵山)·용천(龍川)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조직인 보합단(普合團)과 연계투쟁을 전개하면서 의주·용천·선천 등지에서 친일파 관리들을
송병선(宋秉璿)은 1867년 충북 옥천의 이지당(二止堂)에서 시작된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전국 각지를 순례하면서 143명의 사우와 1,100여 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양성, 규합하였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 시대 일제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인력을 배양하고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했다. 1877년부터 1905년에 이르기까지 20여 차례가 넘는 상소를 통해 무분별한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를 개선하고자 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을 막고자 상소운동을 전개하여 정부를 상대로 내정의 정비, 강력한 군사력 배양, 외세의 척결을 주장하여 시정에 반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884년의 신사봉사 8개조를 통해 대내적인 안정을 꾀하고 일제의 세력을 철저히 배격하여 국권회복의 토대 마련을 주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2차례 상소를 통해 을사늑약의 파기와 을사5적을 처단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고, 주권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각국의 사신들에게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려 외교관계를 이용하여 무효화를 시도하였으나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고조 광무제를 직접 만나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방책을 강구하고자 1905년 12월 한성으로
김철(金澈)은 1917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상해로 망명하였고, 1918년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초 선우혁·서병호 등과 함께 비밀리에 국내로 들어와 국제정세를 알리며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여 3·1 대한광복운동 봉기를 도왔으며 상해로 돌아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폈다. 그해 4월 10일 1회 임시의정원의 전라도 의원으로 당선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 제정 및 정부 조각에 참여하였고, 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5일 임시정부 교통차장에 임명되어 당시 취임하지 않았던 총장 대리를 겸하면서 활약하였다. 1922년 김구 등과 시사책진회를 결성하여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앞장서 추진하였다. 1924년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검사장, 1926년에는 국무령제 정부의 각료인 국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부흥에 힘썼다. 1930년에는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에 동참하고 국무위원제 정부의 군무장이 되었다. 1932년에는 상해 한인동포들의 권리증진과 생활안정을 위해 조직된 교민단체인 대한교민단 정치위원으로 선출
현익철(玄益哲)은 1911년경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간도로 망명하였다.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였지만,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 위폐를 시도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8년 다시 간도로 망명하여 서간도 흥동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썼고,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에는 서간도지역의 유력한 독립운동기관인 한족회,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여 독립군 활동을 펴면서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작전을 수행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간도로 망명하여 1924년 남간도 지역 독립운동 통합 조직인 대한통의부의 외무위원장, 1925년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 1929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과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7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1936년 말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 상해로 다시 망명한 뒤 임시정부와 함께 남경, 장사로 이동하면서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여 그 대표로 항일 민족역량의 통일을 위해 애쓰고, 앞장서 독립운동 정당 통일운동을
윤병구(尹炳求)는 1903년 10월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에 조직된 한인 구국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05년에는 하와이 한인사회 대표로 선출되어 이승만과 함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하와이 한인 동포들의 독립요청서를 직접 전달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 이상설과 이위종이 1907년 뉴욕에 도착하자 이들과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한국 특사로 활동하는 등 우리 한민족의 자주독립 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는 구국 외교활동을 전개하면서 미주 한인사회의 중추적인 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미주 한인들의 결합과 독립운동방안을 모색하고자 1908년 덴버에서 이승만, 박용만 등과 북미 대한인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중심으로 강제 병합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1912년에는 대한인국민회 2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미주 각 지역으로 순회강연을 다니며 미주 한인들의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인국민회 교섭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차 한인대회에 참가하여 미국정부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청원서 작성자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1919년
최시형(崔時亨)은 1861년(철종 12년) 동학교도가 되었고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2대 교주가 되었다. 1864년 조선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에 은신하였다가,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 울진으로 돌아다니며 포교에 힘썼다.1871년(고조 8) 이필제(李弼濟)가 그의 승낙 없이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여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가중되자 소백산의 암굴에 피신하였다. 그 뒤 영월을 거쳐 인제에 가서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발간하는 등 경전을 완성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정국이 소란하여 동학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자, 조직 강화에 힘써 6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6임소(六任所)를 설치하여 종교로서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18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 등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 관찰사에게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및 탐관오리의 숙청 등을 요구하는 글을 보냈으나 묵살당하였다. 이듬해 2월 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여, 박광호(朴光浩)를 소두(疏頭)로 하여 각 도의 동학 대표자 40여 명을 보내어 고조 광무제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고 고조 광무제로부터 해산을 조건으로 선처를 약속받고 일단 해산했으나, 시행될 기미가
전봉준(全琫準)은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내게 하고 양민의 재산을 수탈하는 행위를 일삼았고 1893년 물세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만석보 밑에 다시 보(洑)를 축조하여 불법으로 세를 징수하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음력 2월 15일 동학교도를 이끌어 고부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세금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부패한 관리들을 붙잡았다. 음력 4월 26일에 백산 기포(白山 起包)를 일으켰고 보고를 받은 조선 정부에서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선처를 확약하자 농민군을 해산하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으나, 이용태 역시 탐학이 심했으며 농민군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무자비한 탄압·처벌을 감행했다. 이에 재봉기를 결의하고 국가 정치와 사회제도의 전면 개혁을 단행하고 보국안민의 동학사상을 펼 뜻을 굳혔다.이해 음력 3월 동지 정익서(鄭益瑞)·김도삼(金道三) 등과 협의하여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동학교도를 주도 세력으로 하고 농민대중의 호응을 얻어 진용(陳容)을 정비하고 고부의 백산(白山)을 근거로 8천여의 병력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동
이준용(李埈鎔)은 1907년 8월 14일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져 종1품 숭정대부의 자품을 받고 대한제국 육군 참장(參將)이 되었으며, 12월에 이화대수장(李花大綏章)을, 1908년 9월 서성 대수장(瑞星大綬章)을 차례로 받았다.1909 - 1910년 친일 단체 신궁봉경회 총재를 맡아, 한국의 건국 시조인 단군을 일본 건국신화의 아마테라스와 신궁에 함께 배치하여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에 종속시키려고 하였다. 1910년 8월 5일 종친으로 가장 높은 자품인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1910년 8월 27일 대한제국 최상위 훈장인 금척대수장(金尺大綏章)을 받았으며 일본 메이지 일왕으로부터 훈1등 욱일장을 수여받았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한일 강제 병합 뒤 일제는 누구보다도 먼저 이준용에게 은사금을 주었다. 1910년 8월 중추원 고문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