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찬(李殷瓚)은 1907년 고조 광무제가 강제 퇴위를 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그해 9월 이구재(李九載)와 함께 기의하여 원주 일대에서 활약했다. 의병 500여 명을 모은 뒤, 경북 문경으로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의병의 총대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이인영의 승낙을 얻어낸 후 원주로 돌아와 사방으로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하고 한성 진공을 위해 양주(楊州) 집결을 전국의 의병들에게 촉구했다. 이에 호응하여 양주에 모인 의병들로 13도의병연합부대가 편성되자,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인 이인영의 중군(中軍)이 되었다. 1908년 1월 일본군의 공격으로 흥인지문 밖 30리 지점에서 퇴각하면서 한성진공작전은 실패했다. 그뒤 소속부대를 이끌고 양주 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허위(許蔿)의 의병부대에 합류, 임진강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고 허위를 총대장에 추대한 뒤 활동했다. 1908년 말 허위와 농민출신 의병장 김수민(金秀敏)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하자 잔여부대를 이끌고 양주·포천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기습공격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1909년 1월 중순 일본군의 탄압이 본격화되자 부대원을 이끌고 연평도의 일본군 기습대를 공격하는
오화영(吳華英)은 1919년 2월 17일 박희도(朴熙道)를 만나 기독교의 독립운동 참여를 논의하고 이튿날 박희도·이승훈(李昇薰) 등을 만나 기독교에서도 일본 정부와 총독부에 청원서를 내고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여, 개성지방의 책임을 맡았다. 2월 27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다음날 인쇄된 독립선언서 500여 장을 개성의 강조원(姜助遠)과 원산의 곽명리(郭明理)에게 전달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泰和館)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한용운(韓龍雲)의 간단한 식사를 듣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복역중이던 1920년 부인 이명희(李明姬)도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고 독립신문을 배포한 대한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신앙부흥운동과 민족정신 함양에 힘썼다. 1923년 1월 유진태(兪鎭泰)·이종린(李鍾麟)·백관수(白寬洙)·정노식(鄭魯湜) 등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발기준비회에 참여하여, 2월 3일 천도교당에서 물산장려에 관한 대중강연을 했다. 1926년 11월 명제세(明濟世)·최익환(崔益煥)·권태석(權泰錫) 등이 발기한 민족단일전선 조직
오세창(吳世昌)은 1902년 6월 개혁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해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교육개발·식산흥업을 표방한 대한자강회를 조직했으며, 손병희의 후원하에 국민의 지식계발을 목적으로 6월 만세보를 발간하는 등 계몽운동·언론활동에 주력했다. 통감부가 1907년 8월 신문지법을 적용하여 대한자강회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11월에 남궁억(南宮檍)·장지연·윤효정·권동진·지석영(池錫永) 등과 더불어 대한자강회의 이념을 계승한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1909년 유길준(兪吉濬)과 융희학교(隆熙學校)를 설립하고, 장효근과 함께 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한 대한민보를 발간하여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자, 삼갑운동(三甲運動)을 추진하는 등 천도교 교단에서 활동했다. 1918년 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당시의 세계정세와 국내동향으로 보아 일대 독립운동을 일으킬 시기라고 생각하고, 최린(崔麟)·권동진(權東鎭)과 함께 독립운동 준비를 발의했다. 1919년 1월 초 국내에 들어온 도쿄 유학생 송계백(宋繼伯)으로부터 도쿄
안재홍(安在鴻)은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해 5월 비밀조직인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조직, 대한민국 청년외교단 총무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다가 총독부에 의해 검거되어 11월 경상북도 경무부에 의해 대구로 압송되었고 재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1922년 출소 이후 1923년 최남선 등과 시대일보(時代日報)의 창간에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시대일보 논설기자로 언론에 첫발을 디딘 후 이사와 논설위원을 지냈다. 같은 해 9월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 겸 이사가 되었고, 1926년 9월부터는 주필 겸 발행인이 되었다.1927년에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김준연·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홍명희·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지내면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벌여나아갔다. 1930년 1월부터 조선상고사를 시작으로 신채호의 저작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조만식·김성수·송진우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 물산장려회(物産奬勵會) 이사에 선출되었으며 국산품 장려운동을 주관하였다.1931년 5월 조선일보 사장이
신돌석(申乭石)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독립운동이 봉기하자 1896년 3월 영해의병에 가담하여 중군장(中軍將)으로서 의병 100여 명을 이끌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을사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가산을 털어 자금을 마련하여 1906년 3월 13일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기호를 내걸고 다시 기의했다. 영해·울진·원주·삼척·강릉·양양·간성 등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백두대간의 산간지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오르내리며 기습전을 펼치는 등 크게 활약했다. 1907년에는 영덕의 관공서를 격파했으며 영양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퇴각시켰다. 경주의 대산성에서도 수일 간 전투를 벌였으며 다시 영덕의 조현(鳥峴)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10월에는 영해경무서를 습격하여 일경을 추방한 후 수동으로 돌아가 군량을 모으고 군졸들을 쉬게 했다. 같은 해 12월 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13도의 의병이 연합하여 한성 공격을 목적으로 전국의 13도의병연합부대가 양주로 모여들 때,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올라왔다. 13도 연합의병부대의 각 도 의병대장은 양반·유생 출신의 의병장으로만 편성하였으
백용성(白龍城)은 1919년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에 불교 대표로 참가, 앞장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1921년 출옥과 더불어 우리 한민족이 불법에 귀의하여 민족의 위기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제창하면서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고 대각교(大覺敎)를 창시했다.대각사상은 심(心) 이외의 것은 모두 부인하고 불(佛)과 진심(眞心)과 아(我)를 일체로 보며, 이 진심에 의하여 천지만법이 창조된다는 사상이다. 대각의 근원은 여래장(如來藏)으로, 대각이란 모든 중생이 갖고 있는 근본심성인 불성을 자기 스스로 깨치고 또 다른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자각각타(自覺覺他)를 말한다.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대사회적 실천운동인 대각운동을 전개했다.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각해일륜(覺海日輪) 등 30여 종을 저술하고, 대각사에서 화엄경·원각금강경(圓覺金剛經) 등 30여 종의 경전을 번역했다. 우리말, 우리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시기의 이러한 번역작업은 항일운동의 일환이었다. 선종 포교당을 건립하여 포교에 힘썼는데, 이때부터 참선이라는 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포교의 대중화와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은 1904년 3월 10일 러일전쟁이 터지자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특파원으로 대한제국(大韓帝國)에 왔다.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 보도하던 베델(배설:裵說)은 데일리 크로니클을 사직하고 1904년 7월 18일부터 한국인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영문판)를 발행하고, 1905년 국한문판을 발행하였으며 일본인 검열관의 사전 검열을 피하기 위해 베델의 이름으로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던 대한매일신보에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이 모여들어 일본을 통렬히 비판했다. 1907년 대한매일신보의 발행부수는 1만부를 넘어 최대 신문사가 되었으며,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합병된 1910년까지 6년 동안 일본에게 침략당하는 대한제국의 실상을 알리고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등 항일 사상을 고취하였고 고조 광무제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에 실어 일본의 침략 만행이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도록 하였다.
박승환(朴昇煥)은 대한제국 육군 참령을 지냈으며,명성황후 살해사건, 을사늑약,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 등 일제의 만행에 대해 보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1907년 7월 정미늑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일제 통감부를 통해 장악하면서 이후 강제 병합의 최대 장애가 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킬 것을 순종 융희제에게 강요했다.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칙령이 내려졌으며, 8월 1일에는 군대 해산식이 강행되고 무기가 압수되었다. 이때 시위보병(侍衛步兵) 1연대 1대대장으로 있던 박승환은 병을 핑계로 해산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군대해산의 명을 듣고 분개하여 군인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애석함이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는 내용의 유서를 쓰고 대한제국 만세를 외친 후 자결했다. 박승환의 자결이 알려지자 부대 장병들은 무기를 꺼내 들고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여 일본군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 전투가 끝난 후에도 약 1개월에 걸친 지방 진위대(鎭衛隊)의 해산과정에서 원주 진위대와 강화 분견대(分遣隊) 등이 집단적으로 항쟁을 벌여 많은 군인이 정미독립운동으로 전환하여 무력(武力)이 강화되었다.
박동완(朴東完)은 1919년 2월 하순 박희도의 권유로 3·1 대한광복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2월 27일에 열린 기독교계 대표자회의에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3·1 대한광복운동에는 전도사로 일했던 정동제일교회의 목사 이필주와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했으며 출소 후에는 신간회(新幹會)의 간사를 맡아 활동했고, 기독신보 주필, 신생명 주간으로 언론 사업에 주로 종사했다. 1925년 4월 신생명이 폐간되자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27년 1월 이상재, 안재홍과 함께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본부 상임 간사를 맡았다.1927년 12월 9일 중국 동삼성에서 거주하는 한국인이 중국 관헌으로부터 귀화를 강요받고 박해를 받자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28년 1월 봉천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간도 한국인의 상황을 살폈다.1928년 중반 하와이로 파견되어 오아후 섬에서 목사로 12년간 재직하면서 한인기독교보를 창간하는 등 목회 활동을 하면서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가
나석주(羅錫疇)는 1913년 간도로 이주했으며 간도 뤄쯔거우의 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황해도 겸이포(兼二浦)에서 상업을 하며 항일공작원으로 일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다. 석방된 뒤 정미업을 하며 비밀항일결사를 조직,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보내고 대한독립단원들과 황해도 일대에서 친일파 숙청공작에 크게 활약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0년 9월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경무국 경비원으로 일했다. 1923년 허난성의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다.1925년 상하이로 돌아와 1926년 류자명(柳子明)의 소개로 톈진에서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했다. 1926년 6월 톈진에 체류중이던 유림대표 김창숙(金昌淑)과 모의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 들어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자 총격전을 벌인 끝에 다바타를 사살, 탄환이 떨어지자 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