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李恒福)은 1580년(선조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다. 과거 급제 이듬해에는 한림학사가 되고 1583년에는 이이의 추천으로 친구인 이덕형과 함께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했다. 또 홍문관인 옥당의 벼슬아치로 천거받았다.호조참의가 되어 전곡(錢穀)의 출납에 밝았으므로 판서 윤두수(尹斗壽)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이후 1589년 예조정랑으로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붕당 정치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고 슬기와 인내로써 항상 조심하였으며, 재치와 익살이 뛰어났다. 건저(建儲) 사건이 일어나 정철의 죄안을 처리하는 데 태만하였다고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승지로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가는 도중 이조참판에 올랐다. 두 왕자들을 모시고 평양으로 가서 형조판서에 특진하고 병조판서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권을 얻게 되었다. 명나라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영변과 정주를 거쳐 의주에 이르렀다. 이덕형(李德馨)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맡으며 명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동시에 왕실 근위대 정비에 전력을 다하고 올바른 정치로 선조를 보필하였다.
이덕형(李德馨)은 158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한 뒤 옥당인 홍문관의 직책에 배치되어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박사(博士)가 되고 수찬(修撰)과 교리(校理),이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90년 당상관에 올라 동부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를 지냈다. 1591년 31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서 조선시대 최연소의 나이로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1592년 대사헌의 직책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덕형은 좌의정으로 있던 류성룡,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로서 일본 사신과 화의 교섭을 했으나 결렬되었다. 그 후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여 성공하였다. 임진왜란 중 접반사, 형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우참찬, 우찬성을 지냈으며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정책을 수행하였다.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한성 방어를 강화하였으며, 1598년 4월 38세의 젊은 나이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좌의정, 1602년 3월 영의정이 되었다. 1601
하륜(河崙)은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되었는데 명나라와의 표전시비(表箋是非)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언사가 있다고 하여 문서 작성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나라측의 강경한 요구에 하륜은 정도전을 보낼 것을 주장했으며 1396년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되고 이방원(李芳遠)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그 공으로 정종이 즉위한 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그해 대대적인 관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정당문학이 되었으며,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태종의 즉위 직전에는 정승 반열에 올라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1400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서 관제개편을 주도하고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우정승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관제를 개혁했으며,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楮貨)를 유통시키게 했다. 1402년(태
조준(趙浚)은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에게 중용되어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올랐다. 1390년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했다. 1392년 7월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문하우시중을 거쳐 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었으며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는 등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세자 책봉·요동 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어 이방원(李芳遠)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1400년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 좌정승·영의정부사가 되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 되었다.조준의 정치이념은 인정(仁政)과 법치였다. 궁극적인 목표를 유교의 왕도와 인정에 두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경계를 바르게 하고, 기강을 세우는 문제를 강조했다. 주례(周禮)의 육전에 의하여 중앙 정치제도의 완비와 재상이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주장했다. 재상의 역할은 군자를 천거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군주는 적합한 재상을 얻어 함께 의논할 뿐이라고 했다. 주자학적 통치질
정도전(鄭道傳)은 1388년 음력 6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토지개혁을 단행하였으며 밀직부사에 올라 조준과 함께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바로잡아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와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하여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1392년 4월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살해하였고 정도전은 7월 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정도전은 어명을 받아 새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을 지어 발표하였다. 조선 건국 1등 공신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과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정도전은 천도를 결정하고 도읍 이전을 단행하였는데 경복궁과 태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 및 성안 48방(坊)의 이름을 제정하였다. 노비 해방
황희(黃喜)는 1390년 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이 되었고 이후 직예문춘추관·사헌감찰·우습유(右拾遺)를 지냈다. 1399년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1400년 형조·예조·병조·이조의 정랑을 역임했다. 1401년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추천으로 도평의사사 경력(都評議使司 經歷)이 되었고 승추부도사(承樞府都事)·대호군·지신사·대사헌·병조 판서·예조 판서를 거쳐 1415년 이조 판서가 되었다.1422년 과전(科田)과 고신(告身)을 환급받고, 의정부 좌참찬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다. 1423년 강원도 지방에 흉년이 들자 관찰사로 파견되어 선정을 폈다. 1427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1430년 태석균(太石鈞)의 치죄(治罪)에 관여하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했다. 1431년부터 1449년까지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세종을 도와 국정을 이끌었다. 성품이 강직·청렴하며 사리에 밝고 정사에 능해 국왕들의 신임을 받았지만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국왕의 미움을 사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으며 오랜 관직생활 동안 조선 초기의 국가 기틀을 바로 잡는 데 힘을 기울였다. 현실적으로 불합리하거나 중복·누락된 부분이 있던 경제육전(經濟六
이순신(李舜臣)은 1591년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으며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1592년 음력 4월 13일 일본군 15만 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고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렸다.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다.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정약용(丁若鏞)은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집필하였고 규장각(奎章閣)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예문관 검열,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4년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음력 10월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였고 1799년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병조 참지(參知), 좌부승지를 지냈다.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인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유배(流配)되었고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에서의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저술 대부분의 집필이 이루어졌다.
백관수(白寬洙)는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소식을 접한 일본경찰이 기독교청년회관을 난입, 독립선언 저지와 이를 가로막는 학생들과의 격투가 벌어졌고 삽시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백관수의 낭독은 계속 되었고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 사회자 윤창석의 기도로 폐회하였다. 현장에서 일경에 연행된 백관수는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고 2·8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혐의로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1925년 5월 김준연(金俊淵)·안재홍(安在鴻)·백남훈(白南薰) 등과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만들어 민족운동의 조직을 육성하려 했다. 연정회와 태평양문제연구회를 단일화하는 등 민족진영 단체를 통합하려 하였다. 1927년 2월 좌·우 이념을 초월한 민족단일단체으로 신간회가 출범할 때, 백관수는 조선일보사 대표로 참가했다. 1927년 여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만국 기독교 청년회 주최 2차 태평양 회의에 이상재가 운영하던 조선일보 편집인으로 조선일보 대표자격으로 참석하였다.1928년 조선일보 사설 ‘보석(保釋)지연의 희생’이 문제가 되어 총독부 경무국에 연행, 주필 안재홍과
김성수(金性洙)는 1915년 4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양성론을 강조하였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 초 그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한편 김성수는 자신의 거처를 독립지사들에게 제공, 이승훈·한용운·최남선·최린 등이 그의 자택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을 준비했다.3.1 대한광복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송진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