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呂運亨)은 1918년 결성된 신한청년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1월 미국 대통령 특사 크레인에게 대한국의 독립청원서 2통을 건네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해줄 것을 부탁했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하여 대한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호소했다. 4월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을 설치하고 임시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을 때 정부의 구성에 반대했지만, 임시정부의 1차 내각의 외무부 차장으로 참여했다. 11월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도쿄로 건너가 하라 총리 등 정부 요인들과 회담하면서 대한국 독립의 정당함을 주장했고,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제의 대한국정책을 혹독히 비판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20년 미국 국회의원 사절단 100여 명이 상하이와 베이징을 시찰하는 동안 임시정부의 대표로 안창호와 함께 이들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역설했고, 1921년 상하이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여 한국 독립과 중국혁명과의 유대관계를 위해 노력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피압박민족대회(遠東被壓迫民族大會)에 참석하여 5인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레닌·트로츠키 등과 만나
이승훈(李昇薰)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자 평양으로 갔다가 민중이 자각해야 한다는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듣고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용동에 돌아와 신식교육을 하기 위한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우고 산술(算術)·수신(修身)·역사·지리·체조 등을 가르쳤다. 이어 교육과 실업을 통해 실력양성을 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여 평북총관(平北總管)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오산학교를 열어 백이행(白彛行)이 교장이 되고 그는 학감이 되었다. 오산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 학생은 7명으로 여준(呂準)과 서진순(徐進淳)이 수신·역사·지리·산수·법제·경제·체조·훈련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후 이광수(李光洙)·이종성(李鍾聲)·조만식(曺晩植) 등이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찬무회(贊務會)를 조직하여 학교의 재정을 마련했다. 1909년 8월 안창호의 발의로 청년들의 수양과 애국심 함양을 위해 설립한 청년수양단체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1년간 거주제한의 형을 받고 제주도 유배 도중 105인사건이 일어나 많은 신민회 간부가 체포되
이강년(李康秊)은 1895년 8월 미우라 일본공사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가산을 털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친일적인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巡檢)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을 체포해 농암(籠巖)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梟首)하였다. 제천으로 류인석을 찾아가 유격장이 되고 군사 1백여명을 이끌고 충주 수안보에 있는 적의 병참을 공격하였다. 이어 문경으로 진군하여 조령삼관문(鳥嶺三關門)을 차단하여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치고 총기 탄환 60여 상자를 빼앗았다. 그 후 다시 제천으로 진군하여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패하자 단양으로 후퇴하였다. 소백산으로 들어가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에 은신하였으며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7월 제천으로 진군하여 원주 진위대(鎭衛隊)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의진(義陣) 등과 연합하여 500여명의 적을 토멸하고 9월에는 싸릿재, 죽령(竹嶺), 고리평(故里平), 백자동(柏子洞)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 13도 연합 의진(義陣)을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참석하였다가
오동진(吳東振)은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에 적극 가담한 후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자 가족과 함께 간도 관뎬 현으로 망명하여 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광제청년단을 조직,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월말경 변호사였던 안병찬(安秉瓚)과 함께 안둥현에서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해 교육부원으로 중국 동삼성(東三省)과 국내를 왕래하며 대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 2월 대한청년단연합회·한족회·대한독립단 등의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산하단체인 광복군사령부가 조직되자 제2영장(營長)으로서 활동했다. 그해 9월 이탁(李鐸)과 함께 전투부대인 광복군총영을 조직하고 총영장에 임명된 후 한성에 중앙연종처(中央聯終處)를 두고 각 도에 지영(支營)을 설치해 일본관리의 일소에 힘을 기울였다. 1920년 7월 미국 국회의원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되자 독립에 대한 염원을 보여주기 위해 이탁·안병찬 등과 의논한 후 7월 상순경 안경신(安敬信) 등 3명은 평양, 정인복(鄭仁福) 등 2명은 신의주, 임용일(林龍一) 등 2명은 선천, 김영철(金榮哲) 등 3명은 한성으로 각각 파견했다. 한성 잠입조는 총독부 폭파를
신익희(申翼熙)는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1918년 말부터 최린·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3·1 대한광복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 비서장·법무총장·외무총장·문교부장 등을 지냈다. 내무부장 재임 중 8·15 대한 광복을 맞이해 귀국했으며, 귀국 후에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는 노선을 달리했으며, 정치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정치활동을 했다. 신익희는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 학장 등을 지냈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의 의원에 당선되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의 의장이 되었으며, 이청천(李靑天)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 합작,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손병희(孫秉熙)는 1910년 재정난에 빠진 동덕여자의숙(同德女子義塾)을 원조하고 같은 해 12월 보성학원(普成學院)을 인수했으며, 1912년 12월 동덕여학교를 인수했으며 지방의 7, 8개교를 직접 관할했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기와 활자들을 구입해 가지고 들어와 한영호(韓榮浩)·최석창(崔錫彰)·민건식(閔建植) 등과 협력하여 주식회사 보문관(普文館)을 설립하고 출판사업을 했다. 1910년 초 새로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당국과 교섭하여 종교적 논설과 교도 상호간의 소식 등을 게재한다는 조건하에서 천도교 기관신문인 천도교 월보를 발행했다. 1910년 말에는 보성학원 소속 인쇄소 보성사를 창신사와 병합하여 보성사로 확대하고 천도교 월보 및 학교 교과서 등을 인쇄·간행했다. 손병희는 오세창·권동진 등과 독립운동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한편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 최린(崔麟)과 협의를 통해 독립운동의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 3개 원칙에 합의했다. 기독교·불교·천도교가 합작을 추진하여 3·1 대한광복운동을 준비했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1910년대 초부터 이종일이 천도교구국단을 조직하고 민중 봉기를 통한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건의하고 있었다. 그
염온동(廉溫東)은 1919년 3.1대한광복운동 당시에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4월에 상해로 건너가 전차감독(電車監督)으로 근무하면서 대한광복운동을 지원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1923년 4월에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돼 1927년 1월까지 의정활동에 참여했다. 1926년 7월 상해 3.1당에서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의 창립총회가 열려 임시정부를 유지·지원하기 위한 후원금을 확보하도록 했는데 이유필(李裕弼)·임필은(任弼殷)과 함께 회계검사원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1927년 3월 상해한인청년회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929년 남경에서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위해 민병길(閔丙吉)·윤기섭(尹琦燮)·성주식(成周寔)·신익희(申翼熙)·연병호(延秉昊)·최용덕(崔容德)·안재환(安載煥)·김홍일(金弘壹) 등과 함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조직했다. 산하에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해 단장에 안재환(安載煥)이 선출됐으며, 김창화(金昌華)·나월환(羅月煥)·이건호(李建浩)·이영희(李英熙)·최경수(崔景洙) 등이 활동하고 기관지로 우리길을 발간해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32년에는 당원이 약 40명 가량
김익상(金益相)은 북경으로 가서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했다. 일제 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처단하기로 계획하고 폭탄 2개와 권총 두 자루를 받아 1921년 9월 10일 북경을 떠나 동월 11일에 한성에 도착 다음날인 12일에 전기 수리공으로 가장해 총독부에 잠입, 폭탄 2개를 투척하였으나 1개는 불발되고 하나만 폭발했다.거사 직후 피신하여 평양에 수일간 체류하다가 북경으로 돌아간 그는 총독부 투탄 거사가 성과를 보지 못하자 재거사를 결심하고, 의열단장 김원봉과 상의한 후 1922년 2월 상해로 가서 동지 오성륜(吳成崙)과 함께 같은 달 28일 오후 3시 30분경 상해 세관 부두에서 필리핀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하는 일본 전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 義一) 육군대장을 향해 오성륜이 먼저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명중되지 않았고, 폭탄을 던지고 이어 육혈포를 연사했지만 안타깝게도 폭탄은 불발되고 탄환도 다나카에게 맞지 않았다. 중국 항무국(港務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일본영사관에 인도되었다가 일본 장기지방재판소(長岐地方裁判所)로 압송됐다. 동지 오성륜은 파옥,탈주했고, 김익상은 1922년 5월 5일 장기(長岐) 형무소로 압
이광민(李光民)은 1915년 백부인 이상룡(李相龍)을 따라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한 뒤 봉천성(奉天省) 류하현(柳河縣)에 있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수료했다.이듬해 봉천성 통화현(通化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4년 7월 10일 1923년에 개최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양분되어 결렬되자 창조파에서는 연해주 해삼위(海蔘威)를 기반으로 이곳에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정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해주 내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하여 추방당하고 중국 동삼성에 진출한 신숙(申肅)·윤해(尹海) 등과 양기탁(梁起鐸)·편강렬(片康烈)은 이장녕(李章寧)·박관해(朴觀海)·이청천(李靑天)을 설득하여 전만주통일의회 주비회 발기회(全滿洲統一議會 籌備會 發起會)를 조직하였는데 이광민은 군정서(軍政署) 대표 중의 한사람으로 참가하여 협의하였다. 1926년 1월 정의부(正義府) 중앙총부에서 내정과 외부 조직을 확장하려고 동삼성 각지와 국내에 위원을 파견하여 군인과 군자금을 모집할 때 파견되었으며 1926년 10월 24일 정의부 중앙위원 11인 중 한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권준(權晙)은 1917년 광복회(光復會)조직에 참여하여 격렬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다가 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했다. 1921년 북경(北京)에서 김원봉(金元鳳)과 같이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군자금 조달과 폭탄 제조 등의 임무를 맡아 종로경찰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폭탄 투척과 동경 이중교(二重橋) 투척 등을 적극 지원했다. 1926년에 쑨원이 세운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수료하고 북벌전(北伐戰)에 참전하여 활약하기도 했다. 1926년 한구(漢口)에서 개최된 한국, 중국, 인도, 몽고, 안남(安南), 대만인 등으로 조직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32년 남경(南京)에서 중국 정부의 후원을 받아 한국인군사학교를 설립하고 그 교관으로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입당하여 활약했다.1934년 중국군 연장(連長)으로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항일전에 참전했다. 1944년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에 들어와 내무부 차장에 임명돼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