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탁(梁起鐸)은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구국 계몽 운동에 뛰어들었고 개혁당에 참가했다.1904년 궁내부에서 영어 통역을 맡게 되면서 베델과 함께 영자 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했다. 1905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는데 참여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에 가담하였다. 1907년 안창호의 신민회에 참가하였고 간도에서 편강렬과 함께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인 의성단을 결성하였고, 흩어진 운동 단체를 통합한 통의부와 정의부, 고려혁명당, 국민부 결성에 가담했으며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1933년 10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고 1935년 10월까지 재임하였다.
이상룡(李相龍)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서 거의하고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年)을 지원했으며 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으며,1909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지내면서 시국강연을 개최했다. 1909년 신민회 간부 비밀회의에서의 결정에 따라 독립운동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1911년 2월 서간도로 망명했다. 1911년 최초의 간도지역 항일자치단체로 개간과 영농에 종사하는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경학사장에 추대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했으며 산업·교육 우선주의와 군사중심주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퉁화 현 합니하(哈泥河)에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허혁(許赫)에 이어 단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신흥강습소도 이전하여 제2의 기지를 정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서간도(西間島)의 독립운동도 무장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류허현 삼원보(三源堡)에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했고 임시군정부(臨時軍政府)를 조직한 후 대
윤봉길(尹奉吉)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긴 채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고 간도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의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과 함께 간도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했으며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고 계몽강연을 했다. 1931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해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교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말총모자 공장 미리공사(美利公司)에서 일을 하며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하면서 영어학교에도 다녔다. 김구는 일제가 상하이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전승축하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탐지하고 폭탄 투척 거사를 준비했으며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의 입단선서를 했다.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식장에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爆殺)했다. 거사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훙커우 공원 거
이봉창(李奉昌)은 1931년 1월 대한광복운동에 투신하고자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갔으며 이봉창 의사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김구 단장을 만나 일본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 폭살(爆殺) 계획을 세우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한달에 한번씩 김구 단장을 만나 거사를 준비했다.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1931년 12월 17일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며 동경으로 출발했다.동경에 도착한 이봉창 의사는 히로히토 일왕이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 연병장에서 열리는 신년 관병식(觀兵式) 참석 정보를 입수하고, 이 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김구 단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1932년 1월 8일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일왕(日王)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으나 일왕 폭살(爆殺)에는 실패하였고 품안의 태극기를 꺼내 대한 독립 만세를 3번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된 이봉창 의사(義士)는 9월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殉國)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일본 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日王)을 대상으로 하였고, 거사(擧事) 장소가 일제 수도 동경이었다는 점에서 비록 일왕
장지연(張志淵)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을미독립운동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조 광무제의 경운궁 이어를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2월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조 광무제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짓고 독소(讀疏)를 맡았다. 1897년 7월 사례소 직원에 임명되었고, 9월 내부 주사를 겸직했다.1898년 4월 대한황성신문을 발행하는데 참여했고, 9월 남궁억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함께 활동했다.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의 주필을 지냈다. 9월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어 취임했다. 1900년 10월 시사총보를 출판사인 광문사로 개편, 설립할 때 참여해 편집원을 맡아 정약용의 목민심서,흠흠신서등을 간행했다. 1901년 황성신문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02년 8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3월 중추원에 연명으로 시정 개선을 촉구하는 정치 경장에 관한 주요 사항 55개 조항을 헌의했다.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의 품계를 받았고, 7
지석영(池錫永)은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많이 읽었고, 제너의 우두접종법(牛痘接種法)에 관심을 가졌다.1876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박영선(朴永善)에게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얻어 보았고, 1879년 10월 부산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일본인 의사에게 2달 간 종두법(種痘法)을 배웠다. 1879년 겨울 충청북도 충주시 덕산면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시술하였고 한성에는 종두장을 설치하였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에서 두묘(痘苗)의 제조법을 배우고 두묘 50병을 얻어서 돌아와 종두법(種痘法) 보급에 힘썼다.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형조 참의(刑曹 參議)를 역임하였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하였다.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1894년 김홍집에 의해 토포사(討捕使)로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다. 1896년 동래 관찰사가 되어서도 종두법(種痘法)의 보급에 공헌하였으며, 1899년 경성의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고조 광무제에게 상소하여 공포하게 하고,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게 하였
최재형(崔在亨)은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여 러시아 군대의 어용상인(御用商人)으로 돈을 벌었고, 러시아 관리가 되어 두 차례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황제를 알현(謁見)하고 5개의 훈장을 받았다. 노우키예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어 연봉 3,000루블을 은행에 예치하여 그 이자로 매년 교포 학생 1명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러일전쟁 후 이범윤(李範允)과 상의,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이범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1908년부터 이듬해까지 산발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일대의 일본 수비대와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재발행,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을 절규하였다. 노우키예프스크 한족민회(韓族民會) 회장에 취임, 교포 자녀들을 위한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으며 1920년 4월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市街戰)을 벌였다.
김가진(金嘉鎭)은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1877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발탁되었고 1883년 유길준과 함께 외교통상 업무를 관장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主事)로 임명되었다. 188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이 되었다. 김가진은 개화정책을 주도하였는데 중국 양무운동을 시찰하였으며 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駐箚日本公使館參贊官)에 임명되어 수년간 동경에 주재하였으며 이후 주일본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임명되었다.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895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이 되었으며 개혁정책의 실무를 담당했다. 1895년 4차 김홍집 내각에서 상무회의소 발족, 건양협회(建陽協會) 창립에 가담하였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설되면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독립문을 조성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가담하여 헌의 6조의 실행을 촉구하였다.1904년 외무대신, 법무대신, 중추원 부의장을 역임하였고 대한자강회, 대한협회에 가담하여 적극 활동하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대한광복운동에 투신하였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
남궁억(南宮檍)은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의 수행원으로 상하이에 갔고 궁내부 별군직을 역임하고, 1894년 내부 토목국장을 맡았으며 흥화학교에서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는 창립총회를 가졌으며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수석 총무와 사법 위원을 겸하였다. 1898년 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었고 1902년 러·일의 한국분할설과 러일협정을 공박하였으며, 성주목사와 양양군수를 역임하고 양양에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1907년 대한협회 회장이 되었으며 1908년 교육월보를 간행하였고 관동학회 회장이 된다.1910년부터 8년간 배화학당 교사로 9년간 재직하였다. 일제가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일장기, 벚꽃 보급에 항거해 모곡리의 감리교 전도사로 일하던 남궁억은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1918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내려와 모곡 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목회하면서 더불어 교회 내에 4년제 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규설(韓圭卨)은 1898년 중추원 의장이 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고조 광무제에게 의원 설치를 건의하자 이에 호응해 새로운 중추원관제를 공포하게 했다.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체포되고 독립협회의 혁파가 논의되자 이들을 석방하고 민의를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법부대신에 임명되었으나, 1899년 정부의 반격으로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될 때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다시 법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12월 미국에게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한 노력을 당부하는 고조 광무제의 밀서를 이승만(李承晩)·윤병구(尹炳求)에게 전달했다. 1905년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으며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늑결하려 하자 일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반대하다가 경운궁 수옥헌(漱玉軒)에 감금되고 면직당했다. 을사늑약 이후 중추원 고문 궁내부 특진관을 지냈으며, 1907년 4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