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양(朴定陽)은 1881년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이용사(理用司)의 당상경리사(堂上經理司)가 되었다. 관제 개혁 등에 앞장섰으며, 1882년 대사성·이조 참판·좌승지를 거쳐 1883년에 기기국 총판(機器局 總辦)·내무 협판·협판군국사무·대사헌·협판교섭통상사무 (協辦交涉通商事務)·도승지·협판내무부사를 역임했다. 1887년 미국 특파 전권공사(全權公使)로 부임하여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다.1894년 호조 판서·교정청 당상(校正廳 堂上)·한성부 판윤을 지내고 갑오개혁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신설되자 회의원(會議員)이 되었다. 김홍집의 1차 내각에 학부대신이 되고 1895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과도 내각을 조직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총리대신 서리와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임했다. 9월 내각을 의정부로 개혁하자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고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였다.11월 독립협회에 대한 황국협회(皇國協會)의 폭력탄압사건이 발생하여 개각이 되자 내부대신이 되었다. 온건중립파로 이상재(李商在) 등 개화파(開化派) 인사들을 돌보았다.
조병세(趙秉世)는 1877년 대사헌,대사헌을 거쳐 1887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88년 예조·이조의 판서가 되고, 1889년 한성부 판윤·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중추원 좌의장(中樞院 左議長)이 되었다. 1896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늑결되자 국권 회복과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하기 위하여 고조 광무제를 만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민영환(閔泳煥)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을사늑약의 무효와 을사5적의 처형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고 곧 풀려났으나 경운궁 대안문(大安門) 앞에서 석고대좌하며 을사늑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다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되었으며 그후 가평으로 추방되었으나 다시 상경하여 표훈원에서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이용익(李容翊)은 1887년 광무국(鑛務局)이 설치된 이후 함경남도광무감리로 임명되어 그 지역 광산을 관리했다. 1890년 서북광무감리, 1896년 서북제부금광사무감독(西北諸府金鑛事務監督)을 거쳐 1897년 각부각군금은동철매탄각광사무(各府各郡金銀銅鐵媒炭各鑛事務)에 임명되어 전국 광산을 감독하였고 1898년 궁내부 소속 광산감독사무가 되어 황실 소속의 광산을 관장했다. 1897년 전환국장이 되어 백동화(白銅貨)를 대량 발주하여 국가 재정에 충당했으며 1903년 중앙은행조례·태환금권조례(兌換金卷條例) 등을 반포했다. 1904년 내장원경(內藏院卿)을 겸임하며 대한제국 황실 재정 강화에 노력했다. 각 도에 광산감리를 임명하여 광산을 관리하게 하고 역토(驛土)·둔토(屯土) 등 국유지를 내장원에 귀속시키고 봉세관(捧稅官)이 도조(賭租)를 징수했다. 홍삼을 제조하는 삼정과(蔘政課)를 증설하여 홍삼의 제조 및 판매를 관장하며 전매했으며 1898년 철도사(鐵道司)를 설립하여 감독을 맡았고 궁내부에 서북철도국이 설치되자 서북철도 감독을 맡아 경의선·경원선 부설을 추진했다. 1901년 지계아문총재관(地契衙門總裁官)이 되어 토지소유자에게 지계를 발행하여 토지의 소유권을 법인(法認
윤치호(尹致昊)는 1881년 신사유람단 조사(朝士) 어윤중을 수행하여 일본에 건너가 1883년 4월까지 체류했다.1883년 5월 초대 주한미국공사 L. H. 푸트의 통역으로 귀국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그뒤 통역으로서 푸트와 고종, 개화파 간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청나라의 간섭 배제와 미국과의 유대 강화, 각종 정치기구 개편에 힘썼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의 외부 협판과 박영효 내각의 학부 협판을 지냈으며 1896년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1897년 독립협회 운동을 이끌면서 토론회 개최 등 국민계몽 활동에 힘을 쏟았다. 1898년 3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주관하여 러시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등 반러시아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8월 2대 회장이 되었으며 10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주최,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정에 반영시켰다.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의 확대와 산업 개발로 자강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표방하고 국민사상 계몽에 노력했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임병찬(林炳瓚)은 1912년 9월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밀명을 받아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으로서 일본 정부와 총독에게 일제의 대한제국 불법 침략을 지적하고 국권 반환을 촉구하는 요구서를 보내고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비밀리에 대한광복운동단체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임병찬은 임응철(林應喆) ·이인순(李寅淳)·곽한일(郭漢一)·전용규(田瑢圭)와 협의하고 1912년 12월 독립의군부 조직을 전라남북도로 확대하였으며 1913년 2월 임병찬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巡撫總將) 겸 사령장관에 임명되었다. 1914년 본부를 서울로 옮기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였으며 대한독립의군부로 개칭하였다. 총사령(總司令)에 추대된 임병찬은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원수부(中央元帥府) 아래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長)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한성·강화·수원·개성·광주에 5영(五營)을 설치하였으며 각 도·군 단위의 조직을 완성하고 대표를 선정하여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고 1914년 5월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신규식(申圭植)은 1902년 보병 부위(副尉)까지 진급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지방 진위대(鎭衛隊)와 연결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했고 1907년 군대해산 후 윤치소(尹致昭)·신창휴(申昌休) 등과 함께 광업회사를 발기하고 실업계를 계몽하기 위해 월간지 공업계(工業界)를 창간했으며 1901년부터 문동학교(文東學校),중동학교(中東學校),청동학교(淸東學校)에 관여하여 교육활동을 하는 한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등에 참가했다. 191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맹, 10월 우창 의거에 참가했다. 1912년 5월 망명자들과 상하이 교민이 늘어가자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 동제사(同濟社)에는 박은식·김규식·홍명희·신채호·조소앙·문일평·여운형·장건상 등이 참여했는데 회원이 300여 명에 이르렀고 중국 상하이 본부 외에 베이징·톈진과 간도·연해주·구미·일본 각지에도 지사를 설치했다.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발기하고, 환구중국학생회에 가입했다. 한인학생의 중국 및 구미의 각급학교 진학을 위한 예비교육기관으로서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군사교육을 위해서 약 1
김동삼(金東三)은 1907년 안동에서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과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세웠으며 1909년 박중화(朴重華)와 함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조직하여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한성의 양기탁(梁起鐸) 등 신민회(新民會) 간부들과 회합하여 독립운동기지 설치와 독립군 양성을 협의했다. 1911년 남간도 류허 현에서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윤기섭(尹琦燮)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민생과 교육, 군관 양성에 노력했다. 1913년 여준(呂準)·이상룡과 함께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했으며, 류허 현의 밀림에 백서농장(白西農場)을 개설하였다. 1918년 길림성 왕칭현에서 서일(徐一)·여준·김좌진(金佐鎭) 등 39명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하고 서무부장에 취임했으며, 남간도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를 조직했으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으로 독판(督辦) 이상룡을 보좌했다. 1922년 요령성 싱징현에서 통군부(統軍府) 조직을 주도하고 교육부장을 지내다가, 통의부(統義府)로 조직이 개편되자 위원장에 뽑혔다
1894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한 이승만(李承晩)은 1895년 미우라 일본 공사가 명성황후를 살해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한 사건에 관계되어 지명수배를 당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 서재필(徐載弼)이 주도한 독립협회(獨立協會) 간부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했으며,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로 활동하고 1904년 고조 광무제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저지를 호소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승만은 1910년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이 되자 귀국하여 대한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건너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하여 대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독립외교론을 주장했다. 이승만(李承晩)은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되었
이회영(李會榮)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1906년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을 책임자로 삼아 동지 획득과 한인 교육에 주력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 늑결의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조 광무제에게 건의하고,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을 간도로 파견했다. 동지들을 평양 대성학교, 안동 협동학교, 정주 오산학교에 파견하고,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했다. 1909년 양기탁(梁起鐸)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이승훈(李昇薰)·김도희(金道熙)와 신민회 간부회의를 소집하여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류허현 삼원보 추가가(鄒家街)로 건너가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과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했다.1911년 최초의 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1912년 퉁
김구(金九)는 1896년 미우라 일본 공사에게 살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조 광무제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1910년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였고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남경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 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이청천(李靑天)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으며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1945년 8·15 대한 광복으로 귀국하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