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종(李瑋鍾)은 외국공관장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을 순회하여 외국어에 능통했다. 아버지가 주 러시아 공사가 되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 주재 한국공사관이 폐쇄되었으나 아버지 이범진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면서 외교활동을 했다.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조 광무제는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3명의 특사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정사 이상설(李相卨)과 부사 이준(李儁)이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장서(長書)를 번역했다.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펴보았으나 희망이 없자 6월 19일 그곳을 출발, 독일의 베를린에서 장서를 인쇄하고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서 장서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를 프랑스어로 만들어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국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고, 각국의 대표위원들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그러나 이러한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특히 영국인 스테드가
황현(黃玹)은 1875년 한성에 와서 이건창(李建昌)에게 시를 추천받아 당시의 문장가이며 명사인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정만조(鄭萬朝)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건창·김택영과는 그후 스승과 친구 사이로 평생 동안 교유하며 지냈다. 1883년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나 시관(試官) 한장석(韓章錫)이 2등으로 내려놓자 회시(會試)·전시(殿試)를 보지 않고 귀향했다. 구례군 만수동(萬壽洞)으로 옮겨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888년에 성균관 회시에 응시,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껴 관계 진출을 완전히 단념하고 1890년에 다시 귀향했다. 만수산에 구안실(苟安室)을 짓고, 3,000여 권의 서적에 파묻혀 두문불출하며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만 전념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사실상 국가의 주권이 상실되었다고 보고, 중국 화이난 지방에 있던 김택영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0년 8월 경술늑약 늑결 소식을 듣자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9월 10일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자결했다.
이인영(李麟榮)은 1895년 미우라 일본 공사에 의한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여주를 기반으로 거병하였으나 의병의 무력으로는 일본군을 당하기 힘들었고,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이인영은 의병대를 해체하고 문경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으며 10년 후인 1905년 을사늑약 늑결 이후 또다시 전국적으로 을사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대를 조직한 이은찬의 권유로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을 맡으며 다시 격문을 뿌리고 거병하게 되었다. 의병을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의병 조직은 한성부로 진공할 계획을 세우고 연합군인 13도 창의군을 구성했다. 허위와 함께 연합군 결성을 주도한 이인영은 13도창의군의 총대장에 올랐다. 그의 휘하로 모여든 의병의 숫자는 약 8천여 명이었으며 허위, 민긍호, 이강년 등 유명한 의병장들이 함께 했다.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은 결사대원을 선발하고 격문을 외국 영사관에 전달한 뒤 양주에서부터 한성 진공을 개시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퇴하였다.
허위(許蔿)는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의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에 분개해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을미독립운동에 나섰으며 경상도에서 이기찬, 이은찬 등과 함께 두 차례 의병을 일으켰다.대한제국 고조 광무제는 허위를 등용하여 성균관에 기용했는데, 1904년 사법 기관인 평리원의 재판장 서리가 되었다. 이해 한일의정서 강제 늑결 사건이 일어나자 이상천, 박규병 등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면서 저항했다. 1907년 고조 광무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국의 의병부대들이 양주에 집결하여 한성 진공을 노렸을 때 이인영을 총대장을 삼아 출범한 의병 연합군 13도 창의군에서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을 맡았다. 허위의 부대는 한성 근교까지 진군하여 패퇴하였으나 조인환, 권준 등과 연합하여 유격전을 벌이면서 계속 저항했고, 이강년, 류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결사 항전을 주창한 강경파로 활동하였으며 1908년 양평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박상진(朴尙鎭)은 영남 지역의 명망있는 유학자로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가 사형당한 허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1910년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졸업하면서 신학문도 익혔다. 졸업후 판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을 거절하고 1911년 영남 지역의 유학자 출신으로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을 위해 간도로 건너간 망명자 허겸,이상룡,김동삼, 손일민,김대락을 만나러 갔다. 귀국한 뒤에는 해외의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안둥 삼달양행과 창춘 상원양행, 지린에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고, 1915년에는 비밀 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조직해 활동했다. 계몽 운동가 중심의 조선국권회복단은 채기중 등이 결성한 의병 운동가 중심의 풍기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했으며, 박상진은 이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을 맡았다.대한광복회의 강령은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 받아 독립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해외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그는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협조하지 않는
어윤중(魚允中)은 1877년 홍문관 교리를 거쳐 전라우도 암행어사에 임명된 뒤, 만 9개월 동안 전라도 일대를 돌아보고 12개조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전라도 지방의 문제가 주로 수취제도의 문란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잡세의 혁파, 지세제도의 개혁, 환곡제도의 폐지, 삼수포세의 폐지, 재결감세(災結減稅) 등 제반 수취제도의 개혁을 주장했고 궁방전과 아문둔전의 개혁, 지방수령의 5년임기 보장, 도량형의 통일, 조운선(漕運船) 제조, 역로제도(驛路制度) 개혁 등을 주장했다. 1881년 조정에서 신사유람단 60명을 일본으로 파견할 때 박정양(朴定陽)·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반장인 조사(朝士)로 선발되었다. 유길준(兪吉濬)·유정수(兪定秀)·윤치호(尹致昊)·김양한(金亮漢) 등의 수행원과 통역관·하인을 거느리고 부산을 출발하여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약 3개월에 걸쳐 일본 메이지유신의 시설·문물·제도 등을 상세히 시찰하고 많은 참고자료를 수집했으며 다른 조사들은 같은 해 7월에 귀국했고 수행원인 유길준과 윤치호를 일본에서 더 공부하도록 남겨놓았다. 청에 파견한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과 합류하기 위하여 일본을 떠나 9월 상하이를 거쳐 톈진에 도착했다. 어윤
홍영식(洪英植)은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파견되자 조사(朝士)로 선발되어 일본에 갔고 일본의 육군을 담당하여 일본육군총제(日本陸軍總制)·일본육군조전(日本陸軍操典)을 작성했다. 귀국 후 군무사부경리사(軍務司副經理事)로 총리국(總理局)을 관장했다. 1882년 홍문관 부제학·규장각 직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부호군(副護軍)으로 난의 수습을 담당했다. 그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이 설치되자 참의통리내무아문사무(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를 거쳐 이조 참의가 되었다가,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 1883년 6월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을 수행하여 미국에 다녀왔는데, 이때 미국에서 신품종의 농작물과 농기계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884년 함경북도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고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해 3월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설치되자 총판(總辦)이 되어 우정사업을 담당했다. 김옥균 등과 함께 정권을 장악할 것을 모의하여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
민영익(閔泳翊)은 187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조참의를 거쳐, 1879년 도승지·호조참판에 이르고 1880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經理統理機務衙門軍務司堂上), 별기군의 교련소당상을 역임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 때까지 윤웅렬(尹雄烈)과 함께 별기군의 책임자로 있었다. 제물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으로 사절단을 파견할 때 김옥균과 비공식 사절로 동행하여 일본의 개화된 문물을 보고 돌아왔다. 이후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로 톈진에 파견되어 해관 사무를 교섭했다.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다음해 5월 주한공사로 L. H. 푸트가 조선에 오자, 조선 정부는 친선 사절로 보빙사(報聘使)를 미국에 파견했다.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여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유길준 등 8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83년 7월 하순 인천을 출발해 나가사키·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9월 18일 미국 대통령 C. A. 아서를 접견하고 국서를 전달했다. 민영익은 보스턴으로 가서 세계박람회와 공공기관을, 뉴욕과 워싱턴에서 정부기관을 시찰하면서 미국 제도에 관한 각종 지식을 습득했으며 우정국(郵政局) 설치, 경
묄렌도르프는 1882년 12월 27일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참의(參議)로 임명되어, 독일 태생의 서양인(西洋人)이 조선(朝鮮)의 고급 관리가 되었고 1883년 1월 12일 통리아문이 외부(外部)에 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확대되자 협판(協辦)으로 승직(昇職)해서 해관(海關)과 변관(邊關) 업무를 총괄하는 정권사(征權司)의 책임자가 되었다.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우두머리는 독판(督辦)이고 책임자로 5인의 협판(協辦)이 있었다. 묄렌도르프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協辦)의 자격으로 어명에 의해 1883년 4월 24일 조선해관(朝鮮海關)을 창설하고 박동(薄洞)에 해관(海關) 본부를 정했다. 1883년 7월 25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독판(督辦) 민영목(閔泳穆)은 일본 공사 다께조에(竹添進一朗)와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과 해관세칙(海關細則)을 조인(調印)했고, 11월 3일부터 실행된 것으로, 일반상품의 관세율이 8% 수준을 유지했다. 9월 19일부터는 인천, 부산, 원산 등지의 개항장에 감리(監理)를 두어 해관(海關) 업무를 감독하도록 했다.총세무사(總稅務司) 메릴(Merrill)은 1885년 10월 부임해서 12월 해관(海關) 본부
박기종(朴琪淙:1839~1907)은 일본어를 익혀 일본을 상대로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으며 김기수(金綺秀)를 수반으로 한 1차 수신사(修信使)가 일본으로 파견되었을 때 통사(通事:통역관)로 발탁되어 일본의 근대 시설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박기종은 철도와 기차에 충격을 받고, 대한제국에 철도를 부설하겠다는 꿈을 품고 부하철도회사, 대한철도회사, 영남지선철도회사 등을 잇달아 설립하였다. 박기종은 1889년 최초의 민간 기업인 기선회사(汽船會社)를 설립함으로써 우리 나라 해운업 개척자가 됐다. 통사(通事:통역관)로 수신사 일행을 수행한 이후 박기종은 무관 벼슬을 얻어 관계로 진출했다. 부산항 경무관(警務官)으로 근무하던 1895년 부산 최초의 신식학교인 개성학교(開成學校)를 설립했으며 1908년 부산실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고, 광복 이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로 이어졌다. 박기종은 1898년 외부(外部) 참서관(參書官)으로 중앙 관계에 진출하게 되자, 부산항과 하단포(下端浦)를 연결하는 경편철도(輕便鐵道)를 부설하기 위해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설립했다. 이하영·지석영·이인영 등 부산 출신 유력인사를 규합해 대한철도회사(1899)를 설립하고, 한성~원산, 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