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姜宇奎)는 일제가 경술늑약으로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자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의논했고 4년 후 랴오허 현으로 이사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1917년 길림성 동화현에 광동중학교를 세워 한인 교육에 전력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 길림성 지부장이 되어 일제 총독을 암살하기로 결심하였으며 러시아인으로부터 수류탄을 구입하고, 1919년 9월 2일 하세가와의 후임으로 사이토 마코토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허형과 함께 한성으로 잠입했다. 강우규는 사이토 총독의 내한 당일 남대문역에서 하세가와의 후임으로 새로 임명된 사이토 총독을 폭살하기 위해 러시아인으로부터 구입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터졌지만, 사이토 총독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대신 사이토 신임 총독을 호위하던 일본인 경찰을 비롯한 사상자가 37명이 나왔다.
이범윤(李範允)은 간도(間島)의 대한국인 보호를 위해 1902년 6월 간도시찰원으로 파견되었으며, 1903년 10월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가 되었다. 토문강(土門江)에 거주하는 대한제국 한인들을 순찰·위로하고 호구를 조사하여 1만 3,000여 명을 편적(編籍)시켰다. 간도의 대한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장정을 모집하여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해 군사훈련을 시키고 모아산(帽兒山)·마안산(馬鞍山)과 두도구(頭道溝) 등에 병영을 설치했다. 10호를 1통(統), 10통을 1촌(村)으로 하는 행정체계를 수립하고 도민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군대유지비를 충당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 군대에 가담하여 사포대를 이끌고 나가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고 러시아 황제에게 훈장을 받았다. 노키에프스크로 가서 최재형(崔在亨)이 세운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최재형·이위종(李瑋鍾)·엄인섭(嚴仁燮) 등이 조직한 동의회(同義會)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모금활동을 추진했으며 이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의병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최재형·이위종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아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의회(彰義會)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최재형의 적극적인
서일(徐一)은 1911년 간도로 가서 명동학교(明東學校)와 청일학교(靑一學校)를 설립했으며 독립군단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고 1918년 간도와 러시아령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전쟁으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취지의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했다. 1919년 3월 중광단을 정의단(正義團)으로 개편하여 김좌진을 맞아 전투태세로 개편하고 단원을 모집하는 한편 무기도 구입하여 독립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8월 정의단은 무장독립군을 보유한 항일단체이자 북간도 전지역을 행정구역으로 삼는 행정부를 겸비한 군정부(軍政府)로 개편·발전되었다. 12월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군정부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면서 총재에 취임했다. 서원(署員)은 1,600명 정도로 러시아에서 구입한 무기로 무장했고, 속성(速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훈련을 시키는 한편 경찰 사무와 정보 연락을 했으며, 지방산업을 진흥시키며 소학교와 야간강습소를 설립하였다.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으나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으로 인해 주력부대를 북간도 미산현 당벽진(當壁鎭)으로 이동시켰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군의 이
1920년 3월 이범석(李範奭)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부름을 받고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大長)으로 부임하였다. 1923년 10월 5일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하였다.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여 오자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은 임시 전투조직을 개편하고 총사령관 김좌진, 군정서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사령관 부관 박영희(朴英熙) 등으로 개편 편성되었으며 이범석은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隊長) 겸 중대장이 되어 보병부대 1개 대대를 백운평(白雲平) 숲속에 매복시켰다. 소총, 중기관총, 수류탄 80만발의 탄환을 집결한 뒤 10월 20일 새벽 그는 우진 이민화(李敏華), 좌진 한근량(韓根凉) 중우 진의 김동(金動), 중좌진의 이교성(李驕成)에게 각각 2백발의 탄환을 직접 분배하였다. 10월 20일 9시경부터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날이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일본군 주력부대 5만이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차 선발대와 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나타났다가 우왕좌왕 흩어질 때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
김좌진(金佐鎭)은 1905년(광무 9) 한성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7년(융희 1) 홍성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한성으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간도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청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김좌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으며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간도에서는 가장 막
홍범도(洪範圖)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되자 간도로 가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하였으며 1911년 함북 경원(慶源)의 수비대를 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으며 만포진(滿浦鎭)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에 나선 일본군이 19사단의 병력과 남양(南陽)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공격해 오자, 홍범도는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9월에는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홍범도는 대한광복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부총재가 되었으며 1921년 러시아령(領) 흑하자유시(黑河自由市)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 러시아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 양성에 힘썼다.
심남일(沈南一)은 1905년 을사늑약 늑결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었고 곡창지대인 호남 일대에 일제의 경제 수탈이 극심해지자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907년 후반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여 기삼연 의병장 휘하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2월 의병장 기삼연이 체포, 총살되고 김율, 김태원 등 수뇌부를 비롯한 다수의 의병이 전사하여 의진이 와해되자 굳건한 항일의지로 의병을 다시 불러 모아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선봉-중군-후군의 전통적인 삼군체제를 확립하고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고시하여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키는 등 의진의 기강을 바로 세워 민심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대일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을 비롯하여 1909년 음력 7월 장흥 봉무동 전투까지 일본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등 전남 중남부 지역 대표적 의병부대로 성장한 심남일 의진은 일본의 국권강탈과 경제적 침탈, 단발 강요, 일본인관리의 임명, 군대해산과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 등에 대하여
곽재우(郭再祐)는 1592년 음력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의주(義州)로 피난 소식이 날아오자, 같은 달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고, 일본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대첩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선두에서 싸웠기 때문에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렸다. 1592년 5월 함안을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 도하작전을 전개하는 왜군을 추격, 대승을 거두었다. 붉은 비단으로 된 옷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와의 악감정 때문에 누명을 쓰고 체포,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의 특별 건의로 석방된 후, 조선 정부는 그의 의병 활동의 공을 높이 사 같은 해 음력 7월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라는 무관직을 내렸고, 음력 10월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음력 12월 성주목사(星州牧使
윤선도(尹善道)는 1616년(광조 8)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류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慶源)·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1628년(인조 6)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다.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9년 효
이황(李滉)은 152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풍기군수 재임 중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