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金允植)은 1879년 서양 과학기술 학습과 미국과의 통상에 대한 사전 교섭을 목적으로 청나라에 파견한 유학생의 인솔 사행(使行) 영선사(領選使)로 톈진에 파견되어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시찰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김윤식은 특히 신무기를 개발하여 군사력을 키워야만 외적을 막을 수 있다는 자강론(自强論)을 전개하였으며 무익한 비용을 줄여 군사력 증강에 써야한다고 주장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군국사무아문(軍國事務衙門)과 통상교섭사무아문(通商交涉事務衙門)의 협판(協辦)이 되고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겸하여 강화에 진무영(鎭撫營)을 설치, 신식 군대 800여 명을 양성했다.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의 원군으로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파를 제거하고 병조판서가 되었고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뒤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들어서자 그의 천거로 외무대신이 되었다. 1907년 황실제도국 총재(皇室制度局 總裁)·제실회계감사원경(帝室會計監査院卿)·중추원 의장((中樞院 議長) 등을 거쳤고, 1908년 훈일등 태극장(勳一等 太極章)을 받았다. 한편 갑신정변과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관련된 인사들을 중심으로 강구회
민영환(閔泳煥)은 1861년 민겸호(閔謙鎬)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伯父) 민태호(閔台鎬)에게 입양되었다. 1878년 대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21세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하였으며 도승지·홍문관 부제학·이조 참판·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을 지냈다.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 판서가 되었다. 1888년,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93년 형조판서·한성부윤을 지냈다. 1894년 내무부독판사(督辦事) 및 형조판서를 다시 역임하였다.1896년 고조 광무제의 특명을 받아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러시아와 밀약을 맺기 위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였는데 러시아 외무대신 로마노프를 만나 협상을 벌였지만 미미한 성과를 얻는데 그쳤다. 민영환은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을 두루 거치면서 서양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고 해천추범(海天秋帆)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1897년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외유하였으며 신진 서양 문물에
김홍집(金弘集)은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돌아와 예조 참판으로 승진했으며 통리기무아문의 통상관계를 전담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발탁되었다. 1882년 3월과 5월 미국·영국·독일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전권대신들의 부사(副使)로 협상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마건충(馬建忠)을 상대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의정·조인했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관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추진했다. 총리대신으로 제1차 갑오개혁을 주도하면서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제도 채택,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 시행, 도량형제도의 채택 등의 개혁을 단행했다. 내무대신 박영효와 연립내각을 수립하여 홍범14조를 발표하고 제2차 개혁을 주도했다. 의정부를 내각으로, 각 아문은 부(部)로 개편하여 군제개혁·재정개혁을 시행했다.
김규식(金奎植)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했다. 1919년 3월 파리에 한국대표부를 설치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고한민족의 주장·대한국의 광복과 평화 등의 인쇄물을 출간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일제의 불법 침략과 한민족의 대한 광복에 대한 당위성을 널리 홍보했다. 김규식은 1919년 8월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지냈으며 1920년 10월 중국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의 학무총장을 맡았다. 1932년 11월 남경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1935년 6월 민족혁명당 주석으로 선임됐다. 1942년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임시정부가 강화되었고 1942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에 선임되었으며 1944년 2월 임시정부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8·15 대한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의 선발대로 1945년 11월 23일 귀국했으며 12월말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둘러싸고 민족 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가 없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고 12
이동녕(李東寧)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1898년 이종일이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했다.1902년 이상재와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양기탁, 신채호, 조성환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며 김구, 이회영을 알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06년 북간도로 망명, 이상설과 함께 한국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인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한국동포의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대한광복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이 때 이상설이 2명의 특사와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가자 한때 귀국하여 안창호 · 전덕기 · 양기탁 · 이동휘 · 이갑 · 유동열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를 조직했다. 이동녕은 안창호 · 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 공립협회와 대한매일신보의 조직과 발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크게 조력하였다. 삼원보에 망명하여 이석영 · 이철영 · 이회영 · 이시영 형제 및 이상룡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설립하고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이동녕은 이상
미국 유학생 신분이던 안창호(安昌浩)는 1905년 한인친목회를 발족시켜 한인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강탈당하자, 1907년 귀국하여 대한국인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애국 계몽 운동 외에도,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을 했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신민회, 대성학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러 차례 연설을 했으며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했다. 1907년 2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했다.1908년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였고 1909년 청년학우회의 창설에 가담했다. 191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중앙 총회 조직에 참석하고 국민회 초대 총회장에 선임했다.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고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고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임명되었고 이어 국무총리 대리에 선출했다. 대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며 인재 육성과 실력
이상설(李相卨)은 1896년 성균관(成均館) 교수가 되고, 탁지부(度支府) 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했을때,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에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상설은 1905년 법부 협판,의정부 참찬을 지내며 외국 서적을 참조하여 만국공법(萬國公法)등 법률을 번역하고 연구했으며 을사늑약 당시 을사늑약 강제 늑결의 결사 반대와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조 광무제에게 5차례 올렸고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국권 회복,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906년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 지역인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에 논의하였고, 간도 용정촌으로 가서 여준,왕창동,박무림 등과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 민족교육에 힘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서전서숙을 문을 닫아야만 했다. 1907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되자, 고조 광무제는 이상설을 정사로 하고, 고조
안중근(安重根)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대한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1906년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으며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으며 7월 이토 히로부미에 의한 고조 광무제의 강제 퇴위와 정미늑약의 늑결, 군대 해산에 따라 강원도에서 정미독립전쟁을 했다. 안중근(安重根)은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부대를 창설하기 위해 두만강 부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臨時査察)이 되었고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대한독립군 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 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대한독립군을 모았으며 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으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했다.1908년 6월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경흥,신아산 전투에서
이준(李儁)은 1895년 법관양성소에 입학,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참여했으며 11월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여 정치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여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 총무를 맡아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아 결국 일본의 요구를 저지시켰다. 12월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 회장을 맡아 반일투쟁을 주도했다. 1905년 윤효정(尹孝定)·양한묵(梁漢默) 등과 같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했으며, 11월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늑결하자 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1906년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했으며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발기하여 유학생들의 장학사업에 힘썼다. 1906년 평리원(平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활약
류인석(柳麟錫)은 주리적 성리학자인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전통적 유교질서인 정(正)에 대비하여 서양세력의 침략 및 서양 문명의 수용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하려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받아들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전국에서 개국 반대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홍재구(洪在龜) 등 강원도·경기도 유생 46명과 함께 척양소(斥洋疏)를 올려 개국이 부당함을 상소했다. 1895년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공사 미우라에 의한 명성황후(明成皇后) 살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자 유생들의 을미독립운동이 일어났고 류인석은 총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전국 사림(士林)에게 격문을 띄워 개화에 반대하는 척왜양(斥倭洋)의 대의를 호소했다.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 늑결되자, 전국 유림들에게 의토(義討)·언토(言討)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1907년 정미늑약이 강제 늑결되고 군대 해산이 이루어지자 전국민의 조직적인 성토대회로 일본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한광복운동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고 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이상설(李相卨) 등의 추대를 받아,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都總裁)가 되어 13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