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李珥)는 1548년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1555년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였다. 1568년(선조 1) 천추사가 명나라로 갈 때 서장관으로 동행한 뒤, 1569년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그해 음력 9월 송강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1573년(선조 6)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국가적 근심거리라고 지적하였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 사항을 열거하였다.1574년(선조 7) 황해도 감사로 약 반년간 재직하였다. 그 후 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기초 서적인 격몽요결을 저술했다. 1581년 음력 9월 홍문관 부제
김일손(金馹孫)은 1486년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올랐다. 14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주서(注書)·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질정관(質正官)으로 있을 때 명(明)에 가서 정유(鄭愈) 등의 학자와 교유하고, 정유가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을 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전파했다.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류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世祖纂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1498년(연조 4) 류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의 언행 가운데 훈구파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은 소훈 윤씨(昭訓 尹氏)에게 지나치게 많은 전민(田民)과 가사(家舍)를 내렸다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했고,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절의를
김종직(金宗直)은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世子嬪韓氏哀冊文)·인수왕후봉숭왕책문(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성희안(成希顔)은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정자·부수찬을 지냈으며 1494년 연조가 즉위한 뒤 군기시부정·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504년(연조 10)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의 직에 있었으나 양화도(楊花渡) 놀이에서 왕의 비행을 풍자한 시를 지은 일로 무관의 말단직으로 좌천되었다. 이에 1506년 그는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과 함께 연조를 폐출시킬 것을 밀약하고, 호조판서 류순정(柳順汀)의 호응을 얻어 군대를 동원하여 거사했다. 연조를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하는 한편 진성대군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이 되어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으며,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이조판서에 올랐으며, 이듬해 창산부원군으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했다. 주청사(奏請使)로 명에 가서 반정의 당위성을 납득시키고 중종 즉위의 인준을 받아왔다. 1509년 우의정이 되었다.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여 군무를 총괄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1513년 영의정이 되었다.
임사홍(任士洪)은 1465년(세조 11) 알성문과에 급제,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홍문관교리·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재직중 훈구파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당하여 사림파 공격의 표적이 되는데, 1478년(성종 9)에는 류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했다. 공주가 보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왔으나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1490년 관압사(管押使), 1491년 선위사(宣慰使)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8년 류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사림파를 축출하자, 이들과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았다. 당시 그의 아들인 희재(熙載)도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까닭으로 화를 입었으나 구제하지는 못했다. 1504년 연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함께 모의, 연조의 생모인 윤비(尹妃)가 폐위·사사된 내막을 연조에게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성종 대의 중신과 사림들이 대거 제거되었는데, 사림파는 크게 위축되어 중종반정 이후 다시 중앙정치활동을
1897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건국(建國)한 근대적 자주독립국 대한제국(Daehan Empire) 정부가 1899년 8월 17일 반포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헌법적 법전의 명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총 9조로 구성되어 있고,대한국국제 1조에서 대한제국이 세계 만국의 공인된 자주독립국임을 밝히고 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皇帝)의 육해군 통수권, 계엄령 발포권, 법률 제정·반포권, 문·무관 임면권, 외국과의 조약(條約) 체결권·선전 강화권·사신 파견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 발발 징후가 보이자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러시아와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제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과 동시에 대한제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대한제국 황성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강점한 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한일의정서를 불법 늑결하고 독도를 비롯한 전국의 군사 요충지를 강제 점령했다. 대한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한일의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慶運宮)은 임진왜란 뒤 선조가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의 사저를 왕의 시어소(時御所)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한 뒤 광조가 이 곳에서 즉위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 인조가 경운궁에서 즉위하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비로소 대한제국 황궁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1905년 태극전(太極殿)·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경운궁과 경희궁 사이에 후원 상림원(上林苑)과 경운궁과 경희궁,경운궁과 의정부(議政府)를 연결하는 운교(雲橋),영성문(永成門) 포덕문(布德門) 대안문(大安門) 인화문(仁化門)이 있다.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고조(高祖) 광무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고조 광무제가 등극한 태극전(太極殿), 귀빈을 접견하던 편전 덕홍전(德弘殿),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접견실·연회장 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환벽정(環壁亭),순종 융희제가 등극한 돈덕전(惇德殿), 고조 광무제의 침실과 접견실 석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3년 어극(御極)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식(稱慶式)을 전통예술극장인 협률사(協律社)에서 열었으며,경운궁(慶運宮)부터 협률사까지 행사 이동시 사용할 포드(Ford) A형 무개차 1대를 칭경식(稱慶式) 의전용 어차(御車)로 수입을 지시했다. 1902년 어극 40주년을 맞은 고조 광무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나라 잔치를 콜레라 발병으로 1903년 협률사(協律社)라는 극장에서 열게 되었으며, 칭경식(稱慶式) 기념 공연을 위해 팔도 광대들과 미기(美妓)들을 뽑아 미리 장악원(掌樂院)에서 풍악과 가무를 연습시켰다. 미국인 알렌을 통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 프레이저로부터 포드의 A형 4인승 무개차 1대를 어차(御車)로 수입하였다. 알렌은 1884년 대한제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최초의 서양 병원인 광혜원을 세워 신임을 받고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의 어의를 지냈다. 인천항에서 하역하고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도를 이용하여 1902년 개통한 한강철교를 건너 남대문역에서 내려서 경운궁까지 가야 했으므로 칭경식이 끝난 후에 도착하였다.황제의 행차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차는 시끄럽고 빨리 달려 고조 광
한성순보(漢城旬報)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한문으로만 기사를 썼다. 1883년 8월 17일 고조 광무제는 통리아문 내에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도록 명하였다. 박문국 초대 총재에 외아문 독판인 민영목(閔泳穆)을, 부총재에 김만식(金晩植)을 임명하고 10월 31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한성순보는 열흘에 한 번 발행하는 순보였고 전체 지면 수는 18쪽이었으며, 제본되어 잡지 형태로 발행하였고 관보(官報) 성격을 띠었다.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한성순보를 발행하던 박문국이 불타자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漢城周報)로 맥을 이었다. 독립신문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정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1896년 4월 7일 창간하였고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한글 전용 신문을 만들었다.1897년 1월 5일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The Independent)을 분리하여 신문을 격일간으로 주(週) 3회 발행하였으며 국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알릴 것이며 부정부패, 탐관오리 등을 고발할 것을 천명하였다.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주필 겸
고조어극40년칭경기념비(高祖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는 1902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어극(御極) 40주년과 망육순(51세)에 기로소(耆老所)에 입사(入社)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비를 보호하는 비전(碑殿)안에 있으며 고조어극40년칭경기념비에는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건국하고 황제위에 등극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비석은 귀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신 앞면에는 대한제국 순종 융희제의 글씨가 있으며, 비문은 윤용선이 짓고 민병석이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건물로 기단 둘레에 돌난간을 설치했다. 비전의 남쪽에 설치한 문은 돌기둥을 세우고 철문을 달았는데, 문의 가운데칸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을 얹어 ‘만세문(萬歲門)’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기로소(耆老所)는 조선시대에 연로한 고위 문신(文臣)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명예 기구이며 국왕과 조정 원로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으며 기로소는 1394년, 태조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 관청을 설치하여 70세 내외의 2품관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耆社)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