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申肅)은 1907년 대한제국 탁지부 인쇄국에서 근무하면서 김남수(金南壽)·김남규(金南奎) 등과 함께 청파동에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고 육영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친일행각을 펼친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으며, 이후 천도교 대구 대교구장을 지내는 등 천도교에서 활동하였다. 3·1 대한광복운동 직전에는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작업을 맡았으며, 3·1 대한광복운동 이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20년 4월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상해로 망명하였고 천도교 상해전교실을 설치하였으며 천도교 이념에 바탕을 둔 통일당(統一黨)을 조직하였다. 1920년 9월 북경으로 가서 군사통일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군사단체의 통일과 무장독립운동 노선을 주장하였다.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 대표로 참여하여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해산된 뒤 창조파는 국호를 한(韓)으로 하는 국민위원회 정부를 세웠으며 내무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톡·길림·하얼빈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1927년 이도하자(二道河子) 부근의 송봉산
류관순(柳寬順)은 공주에서 전도하던 감리교 선교사 사부인(史婦人 :Alice Hammond Sharp)의 권유로 1916년 이화학당(梨花學堂) 보통과에 입학하였으며, 보통과를 졸업한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사부인(史婦人) 엘리스 샤프는 집안 사정이 어려운 류관순을 배려하여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한성에서 3·1 대한광복운동에 참가. 학생들이 다칠 것을 걱정한 프라이 교장이 3.1 대한광복운동 참여를 만류했으나, 학교 담을 넘어가서 3.1 대한광복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월 10일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류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류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갔다.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천안 병천)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을 지휘했다. 일본 헌병대는 류관순의 부모를 죽이고 류관순을 체포하여 검사국으로 이송하였다.류관순은 공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선고되었으며 경성 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다.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獄死)하였다.
박용만(朴容萬)은 1904년 보안회(保安會)가 주도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제에 의하여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옥중에서 이승만과 만나 동지가 되었다. 출옥 후 190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미국의 네브라스카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06년 헤이스팅스 대학,190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해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군사학을 부전공으로 택하고 ROTC 과정도 이수하였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09년에는 네브라스카주 커니에 있는 한인 농장내에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열어 30여 명의 학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1910년에는 헤이스팅스대학 구내로 이전하였다.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을 맡았으며 국민개병설(1911년)과 군인수지(1912년)를 집필했다. 미국 체류 중 네브라스카에서 옥중 동지 이승만을 재회하였다. 1913년 2월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했다.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大朝鮮 國民軍團)을 창설하여 미주지역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고, 국민보 주필을 맡는다. 1917년 뉴욕에서 열린 약소국 동맹회(弱小國 同盟會)에 참석하였으며,
이승희(李承熙)는 서양 종교의 배척과 내정개혁을 요구하는 시사소(時事疏)를 올렸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과 을사늑약의 파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그해 12월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4월 석방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경북 성주의 국채보상단연회(國債報償斷煙會) 회장이 되어 활동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서한을 보내 일제의 침략 만행을 규탄했다. 같은 해 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고조 광무제가 퇴위하자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세계 여론에 강제 퇴위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일제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이 더욱 노골화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류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승희는 1909년에는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의 국경지대에 있는 길림성(吉林省) 봉밀산(蜂密山)에 황무지를 구입, 100여 가구를 정착시켜 한인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고,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14년에 요동(遼東)으로 가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설하고, 공자묘(孔子廟) 등 중국 각지의 유교성적지(儒敎聖跡地)를 순례
김창숙(金昌淑)은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성토 건의서를 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1907년 대한협회(大韓協會)가 설립되자 대한협회 성주군지부를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하였다. 1909년에는 사립학교인 성명학교(星明學校) 설립에 참여하였다.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주장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이를 규탄하는 글을 중추원에 발송하였다.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이 늑결되자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이후 술에 취해 방랑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압송되었다. 부산을 떠나 대구로 압송된 뒤, 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 대표들이 연명으로 서명,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에게 우편으로 제출하였으나 좌절되었고 수백명의 유학자들이 체포되었다.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의원,임
노백린(盧伯麟)은 1900년 한국무관학교 교관, 육군연성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을사늑약 늑결과 군대 해산, 경술늑약 늑결에 반대했다. 1907년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1915년 미국으로 망명했고 미국 하와이 주에 머물면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 박용만과 함께 한인 독립군 부대를 조직했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여 1920년 캘리포니아 주 북부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공군 독립군을 양성했다.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에서 군무부총장을 맡았고,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군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며 신채호, 박용만 등과 함께 무력을 통한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쪽에 속했다. 1919년 임시정부 군무부총장으로 임명되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선발되었으며, 2대 군무총장으로 재선임된 후, 미국에 머물면서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교포인 김종린(金鍾麟)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으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는데, 1920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 맞춰 JN-4D 2대를 이용선·이초 두 사람이 조종한 것이 한국인이 처음 비행기를 조종한
홍진(洪震)은 1898년 평리원(平理院) 판사, 충주재판소 검사를 지냈다. 1910년 경술늑약이 늑결되자 변호사가 되어 한성·평양 등지에서 애국지사를 변론하는 법정 투쟁을 계속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연락 책임을 맡아 활동했고, 4월 한성임시정부의 조직에 참가하여 법무차장이 되었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법제위원장으로 헌법 개정, 국무위원 개선 등 제도 정비에 노력했고 11월에는 충청도 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했다. 1921년 4월 장붕(張鵬)의 뒤를 이어 상하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단장이 되었고, 5월에는 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그해 8월 대(對) 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의 간사장이 되어 한국의 완전독립을 주장하고 일본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으며, 의정원 의원 25명의 연서로 태평양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다음해 7월 국민대표회의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정부에서 의견대립이 생기자 김구(金九)와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1923년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된 뒤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1926년 7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며, 9월 외무총장까지 겸임하면서 비타
이유필(李裕弼)은 1900년대 초 안창호·전덕기·양기탁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12년 일본 정부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할 목적으로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져 1년간 진도에 유배되었다.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발생하자 평안북도 의주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상하이로 망명했다.1919년 임시의정원 창설에 참여하였고 4월 상해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국장을 역임했으며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을 주도했다. 1920년 안창호와 임시정부 선전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그해 8월에는 미국 상하원의 의원단을 찾아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1년 4월 한·중 양국이 대일항쟁에 공동 대처하자는 취지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 설립에 참가했다.1922년 김구, 손정도와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경리부장이 되었으며 1926년 김구가 노병회 이사장직에서 사퇴하자 후임 이사장에 취임했다. 1923년 8월 한인거류민단 민단장에 선출되어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장도 겸임하였고 잡지 민성(民聲) 등을 창간, 발행하였다. 1924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되었으며, 1
윤웅렬(尹雄烈)은 1878년 통리기문아문 참사를 지내고,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1년 5군영(五軍營)에서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조선 최초의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만들고, 좌부영관(左副領官)으로서 별기군을 주도했다.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민들이 친일 인물들의 집을 파괴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자 한성을 탈출하여 원산을 거쳐 부산으로 가서, 박제경(朴齊絅)의 주선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망명했다. 임오군란이 실패한 후 귀국하여, 개화당 인물들과 가깝게 지냈으나 조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행동에 반대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내각의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진행되는 동안 아들 윤치호에게 외세에 의지한 것이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으며, 소수의 일본군으로 다수의 청나라 군대에 대항할 수가 없다는 등 6가지 이유를 들어 실패를 예견했다. 청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이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물들을 귀국시키고 흥선헌의대원왕을 끌어들여 친일 정권을 수립하자 풀
이범진(李範晉)은 1887년 협판내무부사가 되었으며 일본의 침투에 맞서 미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명성황후가 친러정책을 표방하게 되자 농상공부 대신이 되었다. 1895년 7월 궁내부대신 서리가 되었으나 8월 20일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파면되었다. 그해 10월 친일정권에 포위되어 있던 고조 광무제를 궁궐 밖으로 피신시키고 친일정권을 타도하여 새 정권을 세우려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러시아 공사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듬해 비밀리에 귀국,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함께 2월 11일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등의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내각이 들어서자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이범진은 1897년 주미공사가 되고, 1900년 주러공사로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했다.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된 뒤 일제가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고 고조 광무제의 특사 명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국권 회복에 힘썼다. 1907년 6월 고조 광무제의 특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만나 회의에 보내는 장서(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