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강렬(片康烈)은 을사늑약 늑결 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07년 영남 지역 의병장으로 당시 강원도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이강년의 부대에 입대했다. 굉장한 거구이며 힘이 장사였고 능력과 기백을 보여 이강년에 의해 발탁되었고, 한성부 진격을 위해 이강년과 허위, 신돌석의 의병 부대가 집결한 양주 전투에 참가했지만 일본군의 공격에 패퇴했다.1910년 평양의 기독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숭실학교 재학 중 안명근을 중심으로 황해도 및 평안도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체포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서 3년간 복역했고,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무렵에는 황해도 지역에 항일유격대를 건설하려 한 구월산주비대 사건으로 다시 1년여 기간 동안 복역했다. 간도로 피신하여 장춘(長春)의 일본 적십자병원을 습격하고 펑톈에서는 시가전을 감행하고 길림(吉林)의 일본기관을 습격하었다. 화이더현(懷德縣)의 우자쯔(五家子)에서 항일 무장 단체인 의성단(義成團)을 양기탁, 남정과 함께 조직해 단장을 맡았다. 250명의 회원을 보유한 의성단(義成團)은 훈련 기관까지 갖추고 주요 기관에 폭탄을 던지는 테러 행위와 함께 일본군과 직접 시가전을 벌이는 등의
방한민(方漢旻)은 1920년 한성으로 올라와 조선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며 항일기사를 연재하면서 일인을 왜놈으로 표현하는 등 일제를 통렬히 비난하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기사를 특종으로 보도하는 등 일제와 친일파들의 죄악상을 폭로ㆍ단죄하여 민족의 가슴 속에 항일의 의지를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로 인해 조선일보에서 해직되었고,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일제의 감시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항일투쟁활동을 위해 일본행을 결행했다. 1922년 4월 도쿄의 일본대학 사회경제학부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재일한인유학생을 모아 문화신문을 창간했다. 1922년 7월 니가타현(新瀉縣)에서 발생한 한국인 노동자 학살에 대한 진상 보도와 한인유학생 항의 데모를 주도했다.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대성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다. 일제의 대성학교 폐쇄 조치 이후 김정기(金正琪)ㆍ김사국(金思國) 등과 함께 대성학교 내에 동양학원(東洋學院)을 설립하고 사회학과 경제학을 가르치며 교육구국활동을 전개했다. 1923년 8월 개산툰과 용정을 연결하는 천도경편 철도 개통 기념식에 참석하는 총독을 처단하고 일본영사관 및 은행 등을 폭파하여 민중 봉기를 도모할 준비를 진행 중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김상덕(金尙德)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東京)에서 청년독립단원(靑年獨立團員)인 김철수(金喆壽),윤창석(尹昌錫) 등 11명의 대표들과 함께 기독교청년회관(基督敎靑年會館)에서 2·8 대한광복선언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있던 유지들에게 우송한 후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3월 21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금고(禁錮) 7월 15일형을 선고받았으며 2심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3년 2월 2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서 개조파(改造派)에 속하여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나 국민대표회의 분열로 인하여 활동이 중단되자 1924년 봄 중국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磐石懸)으로 가서 김동삼(金東三)·김원식(金元植)과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기관지로 노동보(勞動報)를 발간하였다. 동년 4월 5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청년동맹회(大韓靑年同盟會) 결성에 참가하여 조직의 집행위원과 상무위원 및 정치사회연구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고 9월 27일 길림성에서 조직된 독립운동자후원회(獨立運動者後援會)의 창립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5월 길림성 반석현의
차희식(車喜植)은 1919년 4월 3일 차병한(車炳漢),차병혁(車炳爀) 등과 함께 화성군 장안면(長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의 3.1 대한광복운동을 지휘하였다.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대한광복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전해 듣고, 차병혁,차병한과 함께 이영쇠(李永釗) 등에게 장안면사무소에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계획을 알려서, 인근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면사무소로 모이도록 연락하는 한편 장제덕(張濟德),장소진(張韶鎭)과 함께 석포리(石浦里) 주민들에게 참여하도록 홍보하였다. 군중 200여 명이 모인 장안면사무소에서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다시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雙峰山)으로 인솔하였다. 차병혁(車炳爀),차인범(車仁範)과 함께 2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그 곳의 건물을 파괴하고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다시 석포리(石浦里) 이장 차병한의 제의로 화수리(花樹里)에 있던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방화하였다. 이 때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인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이 권총을 발사하며 도망가자, 차인범(車仁範),정서송(鄭庶松
오광심(吳光心)은 1934년 남편 김학규(金學奎)가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국민부(國民府) 등 3개단체(三個團體)의 전권대표가 되어 임무를 띠고 간도에서 남경(南京)으로 갈 때, 동행하였다. 1935년 7월 남경에서 5당 통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립되자 부녀부 차장에 임명되어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김정숙(金貞淑), 조순옥(趙順玉)과 함께 여군복을 입고 광복군 창립식에 참가하였다. 중경(重慶)에서 창립식을 가졌던 한국광복군은 같은 해 11월 29일 서안(西安)에 본부를 설치하게 됨에 따라 서안(西安)에서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복무하였고 한국광복군이 편성됨에 따라 3지대장인 김학규(金學奎)와 함께 3지대의 간부로서 광복군 선전활동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병력을 모집하기 위한 초모 활동(招募活動)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초모 활동(招募活動) 대상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 청년에 대한 초모 활동(招募活動)도 병행하였다. 한국광복군의 간부였던 오광심은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에서 한국광복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
최현배(崔鉉培)는 1910년 5월부터 3년간 매주 일요일에 개최한 주시경(周時經)의 강습원(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배우고 독립사상을 고취받았다. 1925년에 일본 경도(京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졸업하고, 1926년 동 대학원에 수학하는 중 조선민족갱생(更生)의 도(道)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서 한국민족이 다시 독립하는 방도가 다각적으로 연구되었다.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1937년까지 재직하다가 1938년 2월에 안재홍(安在鴻) 등 기독교 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단체인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의 독립사상 고취운동으로 일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연희전문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되었다. 한글 연구에 정진하여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에 가입해서 1929년 107명으로 구성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漁辭典編纂會)에 참가했으며, 1934년 4월에 중등 조선말본을 간행하였다. 흥업구락부운동으로 실직된 기간에 한글 연구에 더욱 집중하여 1941년 그의 대표작 한글갈을 완성해서 간행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
주시경(周時經)은 배재학당 시절 독립신문사에서 서재필의 언문조필로 있으면서 철자법을 통일할 목적으로 1896년 국문동식회를 신문사 안에 설립했다.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4개월간 활동했으며, 같은 해 7월 학부 내의 국문연구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3년 동안 국문연구안을 작성·제출·토의했다.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된 하기(夏期)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유지들을 규합하여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한 후 2년 동안 이끌었다. 국어연구학회는 1911년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로, 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913년 학회의 이름이 한글모로, 1914년 조선어강습원의 이름이 한글배곧으로 다시 바뀌었다. 주시경은 1909년에는 J.S.게일, 다카하시 등과 더불어 한어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이화학당·흥화학교·기호학교·융희학교·중앙학교·휘문의숙·배재학당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과 여러 강습소를 중심으로 국어(國語) 강의를 전개했다. 1900년 상동사립학숙(尙洞私立學塾)에 국어문법과를 부설하고 1907년 여름에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국어강습소, 같은 해 11월 같은 학원에 설치된
정환직(鄭煥直)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이 되어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으며, 그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로 황해도에 가서 광부들을 거느리고 구월산 일대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 일본군의 힘을 빌리려 하자 일병의뢰반대소(日兵依賴反對疏)를 올려 그 부당성을 통박했다. 1897년 태의원별입시(太醫院別入侍)가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사 겸 토포사로 나가 치안을 확립했으며, 이어 시종관이 되었는데 그해 11월 태묘(太廟)에 불이 나자 고조 광무제를 업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고조 광무제의 신임을 받았다. 1900년 도찰사가 되어 부패한 경주부윤을 파면했다가 모함으로 옥고를 치렀으나, 풀려난 뒤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고조 광무제의 밀지를 받고 한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격문을 붙여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군자금을 조달했다.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1906년 3월 600여 명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켰다. 정용기가 1907년 4월 산남의진을 재건하여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위세를
전명운(田明雲)은 1908년 3월 20일 대한제국 정부 외국인 고문인 친일파 미국인 D. W.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기자들과 만나 친일발언을 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공동회를 개최하여 4인의 총대(總代)를 뽑아 스티븐스에게 항의했으나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그를 구타했다. 전명운은 스티븐스를 저격하기로 마음먹고, 1908년 3월 23일 오전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려고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페리 정거장에 도착한 스티븐스가 일본 총영사와 차에서 내리는 순간 앞으로 다가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었다. 스티븐스가 전명운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뒤에 있던 장인환(張仁煥)이 3발을 쏘았다. 1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으나 2발은 스티븐스의 허파와 허리에 명중시켰다. 총을 맞은 전명운은 병원에 실려갔고, 장인환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스티븐스는 3월 25일 죽고, 전명운은 퇴원한 뒤 구속되었다. 미주 내 한인사회는 스티븐스 저격 의거를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규탄하고 나아가 국권회복운동의 전기로 삼았으며,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공립협회(共立協會)는 재판비용을 모금해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투쟁을 했으며 재판 결과 무죄로 풀려났다.
이종일(李鍾一)은 1882년 2월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같은 해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다. 1894년 보성보통학교(普成普通學校) 교장이 되었으며, 이후 경성시내의 7개 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896년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했고, 1898년에는 청년애국회에 관여하는 한편, 2월에는 류영석(柳永錫) 등과 함께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대한제국민력회는 독립협회가 해산되면 그 이념과 사상을 계승할 것을 확인했으며, 주말마다 실학사상·동학사상·동학교리 등을 강의했다. 러시아 세력의 침투 배격과 이권 수호를 주제로 한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국권수호와 이권의 양여 반대를 주장했다. 1898년 3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경성신문을 창간했으며, 8월에는 순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제국신문은 독립협회 여성회원들의 홍보지로서 민권운동과 여성의 사회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황성신문·만세보와 대한협회의 기관지인 대한민보 등에도 관여했다.1905년 12월 최학래(崔鶴來)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는데 손병희(孫秉熙)와는 이미 1898년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