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도선(曺道先)은 1895년 러시아로 건너가 이르쿠츠크 등지에 머무르면서 세탁업, 러시아어 통역 등에 종사하다가 1909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하얼빈(哈爾濱)으로 갔다. 10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대장대신(大藏大臣)과 회견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기회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것을 결심하고, 안중근(安重根)이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에게 조력을 요청하자 쾌히 승락했다. 조도선은 우덕순(禹德淳)·유동하(劉東夏)와 함께 채가구역(蔡家溝驛)에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도착하면 거사하기로 하고,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거사하기로 약속한 후 대기하고 있었다.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여 미수로 그쳤으며 하얼빈 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했고 체포되어 뤼순(旅順)에 있는 관동도독부감옥서에 이송되었다고 1910년 2월 14일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우덕순(禹德淳)은 1905년 겨울 연해주로 건너가 북간도관리사(北間島管理使)를 지낸 이범윤(李範允)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도 연락을 취하여 의병을 조직, 항일전을 준비하였다.1908년 여름 의병대 참모총장 안중근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흥과 회령 지방 등지의 일본 군영을 습격하여 왜병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09년 봄 다시 러시아로 건너가 연추(煙秋)에서 안중근·김기열(金基烈)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여 함께 결사보국을 맹세하였다. 담배 행상 등을 하며 자금을 모았고, 연해주를 돌아다니며 동지들 간의 연락을 취하였다.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듣고 함께 거사할 것을 약속하였고 유동하·조도선도 동행하여 간도 하얼빈으로 가서 이토 히로부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안중근, 유동하, 조도선 등과 같이 하얼빈 일대를 각자 영역을 정해서 담당구역에 나타나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담당구역은 하얼빈 역, 우덕순의 담당구역은 채가구(蔡家溝)역이었으므로 각자의 구역에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10
송시열(宋時烈)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 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장령에 등용되어 세자시강원 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 )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 )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다가, 김자점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빌미로 조선의 북벌 움직임을 청에 밀고하여 효종이 청에게 추궁을 당하자 영의정 이경석 등과 함께 다시 물러났다. 그뒤 충주목사·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1658년(효종 9)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찬선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라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한 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1차 예송(
윤휴(尹鑴)는 1660년(현종 1)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송시열 등 서인이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여 시행하자, 삼년상을 지내자는 참최설(斬衰說)을 들어 이를 반대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국에서 참최설은 남인의 서인 공격에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는데, 기년복제는 왕과 사대부를 구분하지 않고 사대부의 예(禮)를 왕에게 잘못 적용하여 왕의 지위를 낮추고, 왕의 법통을 둘로 나누어버리는 논리이므로 어떤 경우든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1675년(숙종 1)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여 다시 일어난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집권한 뒤,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으로 조정에 나아갔다.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자,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을 이끌며 활동했다. 이해 승정원 동부승지·이조 참의·대사헌·성균관 좨주 등을 두루 거쳐 이조 판서에까지 승진했다. 이후 대사헌·좌참찬·우참찬·형조 판서·우찬성 등을 번갈아 역임했다.재직중 지패법(紙牌法)·호포법(戶布法)·상평법(常平法) 등 부세제도 개혁안을 여러 번 제기했으나 지패법을 변형한 호패법(戶牌法)만이 시행했다. 도체찰부(都體察府
남구만(南九萬)은 송준길(宋浚吉)에게 수학, 165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정언·이조 정랑·집의·응교·사인·승지·대사간·이조 참의·대사성 등을 거쳐서 1668년 안변부사·전라도 관찰사를, 1674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숙종 초 대사성·형조 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같은 해 남인인 윤휴·허견 등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병조 판서가 되어 무창(茂昌)과 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소론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84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영의정이 되었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 장씨를 가볍게 처벌하자고 주장했으나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사(賜死)하기로 결정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 갔다. 그뒤 유배·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등용되었으나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강릉의 신석서원(申
안용복(安龍福)은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3월 박어출과 함께 일본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인슈(因州)로 끌려갔으며 호키슈(百耆州) 번주(藩主)가 막부(幕府)에 보고하자 막부는 설득하여 돌려보내라고 명령했고 6월 30일 안용복은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안용복은 호키슈 태수와 담판을 벌여서 막부로부터 울릉도, 자산도가 조선령 이라는 서계를 받아냈는데, 나가사키에서 대마도(對馬島) 영주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했다.대마도주는 안용복 일행 편에 울릉도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서찰을 보냈으며 조선 조정은 대마도로 보낸 답변에서 울릉도와 죽도를 서로 다른 섬으로 표현했다. 조선 조정은 호키슈에서는 안용복을 잘 대해줬지만 대마도에서 책망한 점을 알아내고 대마도 영주의 행동이 막부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대마도 측 사절에게 막부에게 대마도 영주의 행동을 밝히는 서계를 보내겠다고 말해 사절을 승복시켰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화답문을 고쳐서 울릉도와 죽도가 서로 같은 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일본인들이 조선 영토에 들어와 안용복 일행을 데려간 것은 실책이라고 했다.1695년 3월에 대마도 번주 소요시쓰구가 죽고 그 아우인 소요시미치가 대마
채응언(蔡應彦)은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초기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이진룡 의병부대의 휘하 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평안남도 · 강원도 · 황해도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에 황해도 안평의 순사주재소와 수안 헌병분견소를 공격하고 함경남도 마전도 순사 주재소를 급습하여 무기를 노획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1910년 경술늑약 늑결 이후에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하여 김진묵 의병장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3 - 4백명의 의병부대를 직접 이끌고 경기도 · 강원도 · 황해도 · 평안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근거로 효과적인 유격전술을 구사하였다. 1913년에는 황해도 대동리와 선암의 헌병분견소를 기습하여 일본군 헌병을 처단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평남 성천 산악지대를 근거로 치열한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20명 이상의 일본 군경과 일제에 동조하는 세력을 처단하였고 의병부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매진하였다. 이에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하여 적괴 채응언수색대를 조직하는
한성수(韓聖洙)는 1944년 1월에 학병에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투입되었고 강소성 서주지역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천신만고 끝에 중일전쟁의 최전방인 부양에 위치한 한국광복군 3지대에 입대하였으며 광복군 3지대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0분교에 임시로 설치한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부양에 잔류하여 3지대의 기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김학규 지대장에게 간곡히 요청하여 상해를 중심으로 한 화남지역 공작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홍순명, 김영진 등과 함께 상해에 침투하여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고 공작거점을 마련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군자금을 요청하기 위해 상해에 거주하는 한국인 부호 손창식에게 접근한 한성수는 1945년 3월 13일에 동지 7명과 함께 상해 주재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일본군을 탈출한 전력 때문에 더욱 잔혹하게 고문을 당했으나 한국광복군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일본군 군법회의(軍法會議) 법정에서 일본어 사용을 끝까지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태평양전쟁은 반드시 패할 것이며 한국광복군이 당한 희생만큼 침략자인 일본도 고스란히 당할 것이라고 질타했으며 일본군 군법회의(軍法會議) 재판정을 상대로 죽음을 두려
이동휘(李東輝)는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분개하여 강화진위대 동지들과 항일의병봉기에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전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특히 구국교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강화와 평양 등지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세우고 국학 및 근대학문과 군사교육을 병행하여 구국인재양성의 요람으로 활성화시켰다. 1908년에는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한편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투옥되었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한 이동휘는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고, 1913년에는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권업회(勸業會)에 참여하는 등 한인의 자치와 결속을 도모하고 국내에서 전개하던 애국계몽운동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무장투쟁론을 구현하기 위해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건립을 추진하고 독립군을 육성하기 위해 대전사관학교(大甸士官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좌·우익노선과 외교독립론·무장독립투쟁론이 하나로 결집되어 상해 통
김복한(金福漢)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요로 전국이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행동에 나섰다. 12월 1일 이설·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성에서 거병하여 창의소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거사는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한성으로 압송되어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조 광무제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는 중차대한 위기에 처하자, 12월 2일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자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구금된 김복한은 낙향하여 안병찬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1906년 5월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한 의병 부대가 홍주성을 점령하였으나, 홍주의병도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김복한은 의병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파리강화회의에 대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영남과 호서의 유림들이 연대하여 연명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냈으며 이 파리장서운동으로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