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太祖)는 1395년 법궁 경복궁(景福宮)을 창건하여 건춘문(建春門),영추문(迎秋門),신무문(神武門),광화문(光化門,월대,해태상)과 동십자각,서십자각을 잇는 궁장(宮墻)을 축조하였고 세종(世宗)은 1426년 경복궁의 후원을 조성하는데 녹산(鹿山),향원정(香遠亭),관저전(關雎殿),충순당(忠順堂),서현정(序賢亭),취로정(翠露亭)이 있고 북원(北苑)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오운각(五雲閣), 1칸 규모의 정자 옥련정(玉蓮亭),친경(親耕)하며 풍농 기원하는 경농재(慶農齋),군인들이 연습하는 중일각(中日閣),고조 광무제가 신하에게 칙지(勅旨)를 내린 대유헌(大有軒),문과 시행하는 융문당(隆文堂),무과 시행하는 융무당(隆武堂),과거(科擧) 시행, 군사 훈련하는 경무대(景武臺)가 있으며 1865년 흥선헌의대원왕이 중건하였다. 경복궁(景福宮)은 의례와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 근정전(勤政殿),국왕의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 사정전(思政殿),대전 강녕전(康寧殿),중궁전 교태전(交泰殿),동궁전 자선당(資善堂),세자가 학문 강학하는 비현각(丕顯閣),세자의 사무 공간인 계조당(繼照堂),대비전 자경전(慈慶殿),집현전(集賢殿) 수정전(修政殿), 나라의 경사가 있을 대 연
대한제국 황제릉(皇帝陵) 홍릉(洪陵)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는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 천장산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붕어(崩御)하자 그 해 3월 4일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해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함께 합장하였고 봄 ,여름,가을,겨울의 사시,동지(冬至) 후 3번째 술일(戌日)의 납일(臘日)과 한식,단오,중추의 속절(俗節),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친제(親祭)를 봉행했다. 초대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은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으며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전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석물이 참도와 침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고 문인석, 무인석,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이 순서대로 참도(參道)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릉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순종 융희제와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閔氏)
4월에 절정을 이루는 오얏꽃은 자두꽃으로도 부르며 신라 말 도선(道詵) 스님이 쓴 비기(秘記)에 왕(王)씨에 이어 이(李)씨가 한양에 도읍한다고 예언하고 고려 왕실은 한양에 벌리목사(伐李牧使)를 두어 백악(白岳)에 오얏(자두)나무를 심고 나무가 무성할 때면 모두 찍어서 이(李)씨의 기운을 눌렀지만 이(李)씨가 1392년 조선을 건국했다. 1897년 10월 12일 고조 광무제가 대한제국(1897-1919)을 건국하면서 오얏 이(李)자에서 따온, 오얏꽃(자두꽃) 문양, 이화문(李花紋)을 대한(大韓) 황실(皇室)의 상징 문장(紋章)으로 삼았으며 이화문(李花紋)의 문양은 여러 형태로 남아 있지만 대체로 다섯 꽃잎의 꽃잎마다 셋의 꽃술을 놓고 꽃잎 사이에 또 꽃술을 하나씩 놓은 꼴로 정형화됐다. 대한(大韓) 황실(皇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화문(李花紋)은 대한 황실의 상징 문장(紋章)으로서 황실 복식과 창덕궁 인정전 용마루,가구,자기,시계,우표 등의 각종 황실용품, 대한제국 순종 융희제(1874-1926)과 순정황후((純貞皇后:1894~1966)가 사용했던 어차(御車) 문에 황실의 상징 문장인 이화문(자두꽃)을 금도금했다. 은제탕그릇은 대한 황실
대한제국(大韓帝國;Daehan Empire)의 국기(國旗)인 태극기(太極旗)는 흰색 바탕에 태극(太極) 문양과 네 모서리의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四卦)로 구성되어 태극(太極)을 중심으로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기, 태극기(太極旗)의 흰색 바탕은 밝음과 순수,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민족성을 나타내고 있다. 태극(太極) 문양은 음(陰 : 파랑)과 양(陽 : 빨강)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주 만물이 음양의 상호 작용에 의해 생성하고 발전한다는 대자연의 진리를 형상화하였고 4괘(四卦)는 음과 양이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건괘(乾卦)는 하늘을, 곤괘(坤卦)는 땅을, 감괘(坎卦)는 물을, 이괘(離卦)는 불을 상징하고 있다. 국기 제정은 1882년(고조 19년) 5월 22일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이 계기가 되었는데 태극(太極) 문양을 흰색 바탕에 빨강과 파랑으로 그려 넣은 태극도형기(太極圖形旗)를 임시 국기로 사용하였고 김홍집이 태극도형기에 8괘(卦)를 더하여 태극과 8괘 도안의 태극기를,이응준이 태극과 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창안하였다. 1882년 9월 박영효는 고조(高祖)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우리나라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부터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국가적으로 거행하였고 제도화된 환구제(圜丘祭)는 10세기 고려 성종(成宗) 때부터다. 조선 세조(世祖) 대에 환구제가 폐지되었다가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고조 광무제가 천자의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하고 1대 황제로 등극하였다.환구단은 1897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 등극의식과 환구대제를 봉행하기 위해 남별궁(南別宮) 터에 제천단(祭天壇)을 조성하고 북편에는 1899년 화강암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를 축조하고 신위판(神位版)을 봉안(奉安)하였으며, 1903년 고조 어극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石鼓)단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태묘제(太廟祭)는 역대 임금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서 춘하추동의 첫달과 12월 섣달에 대제를 올렸는데 경건한 분위기를 더욱 고양시키기 위한 음악과 무용으로서 태묘제례악이 따른다.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로 시작하여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천조례(薦俎禮), 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아헌례·종헌례에 이어 음복례(飮福禮)가 행해지고, 신을 보내 드리는 송신례(送神禮)를 갖춘 후에 축(祝)과 폐(幣)를 망료(望燎) 위에
왕릉,황제릉은 모두 42기인데 북한 개성에 있는, 태조의 첫 번째 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인 제릉(齊陵)과 조선의 2대 정종 및 그 비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인 후릉(厚陵)을 제외한 40기가 대한민국에 남아 있다. 국왕이나 왕후는 5개월만에 왕릉에 묻힌다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명시되어 있으며 국왕이나 왕후가 승하(昇遐)하면 곧바로 능호(陵號)를 정하고, 왕릉으로 삼을 만한 좋은 터를 마련한 뒤 왕릉의 조성 공사에 돌입하여 장례를 치르기 전에 완공하였다. 반정(反正)을 통해 국왕이 된 인조는 즉위한 뒤 자신을 낳아준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면서 장릉(章陵)으로 격상되었다. 단종의 능은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의 신분으로 졸했기 때문에 노산묘(魯山墓)로 불리었다가 숙종 대에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장릉(莊陵)으로 조성되었으며 단종의 능은 무인석(武人石)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태조의 두 번째 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태조가 승하(昇遐)한 후 태종에 의해 신덕왕후의 능이었던 정릉(貞陵)이 폐릉되었다가 현종 대에 이르러 태조의 계비로 인정되어 다시 복위되고 능도 왕릉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국왕으로 재위하였다가 실정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이 건국되어 황제(皇帝) 폐하(陛下)와 황태자(皇太子) 전하(殿下)가 되었으며 폐하(陛下)는 황제(皇帝)와 황후(皇后),생존하는 전임 황제로 현 황제의 부(父)인 상황제, 생존하는 전임 황후로 현 황제의 모(母)인 황태후에게 쓰는 경칭(敬稱)이고 전하(殿下)는 차기 황위 계승권자인 황태자(皇太子),황태자비(皇太子妃),친왕(親王),친왕비(親王妃)에게 쓰는 경칭이다. 황제는 황자(皇子) 중 황후가 낳은 적장자(嫡長子)를 황태자로 책봉(冊封)하며,귀인이 낳은 서자에게 친왕의 작위(爵位)를 내렸다. 1900년 대한제국 1대 고조(高祖) 광무제는 황자 의친왕(義親王),완친왕(完親王),영친왕(英親王)에게 친왕(親王) 책봉했다. 문화재청은 일제 통감부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한 황위 승계 1순위 의친왕(義親王)을 대한제국 3대 황제로 추숭(追崇)하여야 한다. 대한제국 고조(高祖) 광무제는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추존하였으며 1907년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英親王妃)로 간택하였고 일제 통감부가 황위 계승 1순위 의친왕(義親王)의 황태자 책봉(冊封)을 막았으며 1910년 8월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
1869년 조선(朝鮮)에 파견되던 일본 외무성 관리가 일본 정부에 제출한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가 된 시말(始末)에 대해 조사하고 울릉도와 독도(獨島)는 조선령이라고 결론지은 내용이 있으며 1877년 일본 최고 권력기관 태정관(太政官)은 태정관 지령문(太政官指令文)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獨島)를 조선국(朝鮮國) 영토로 인정했다. 고조(高祖)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환구단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체 및 영토가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계승됐다. 한반도 간도(間島) 녹둔도 제주도 동해(East Sea)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고조 광무제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일(統一)했으며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勅令) 41호
국왕의 임종(臨終)이 가까워지면 정사를 보는 곳에 모시고 왕세자(王世子)와 신하 등이 마지막 명령을 기다리며 숨이 끊어지면 곡을 하고,내시(內侍)가 평소에 왕이 입던 웃옷을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 상위복(上位復)을 3번 부르고 던지면,다른 내시가 그 옷을 받아 왕의 시신을 덮는다. 왕세자·대군(大君)·내명부(內命婦) 등 모두가 머리를 푼 다음 흰 옷과 흰 신,거친 베로 만든 버선을 신고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상사(喪事)의 절차에 소홀함이 없도록 엄하게 영을 내리고,이조(吏曹)에서는 초상을 집행할 관원과 업무를 정한다.내시들이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옷을 입힌다. 음식을 갖추어 술잔을 올리고,왕세자(王世子)·대군(大君)·왕비·내명부(內命婦) 등이 각자의 위(位)에 나아가 곡을 하며 문관은 동쪽,무관은 서쪽에 서서 모두 곡을 하고 4번 절한다.시신의 입에 쌀과 진주를 물리고,시신이 썩지 않게 나무틀을 짜서 얼음을 넣어 시신의 사면을 둘러싼다. 붉은 칠을 한 의자에 흰 천으로 영좌(靈座)를 만들고,붉은 천에 금박으로 대행왕재궁(大行王梓宮)이라고 써서 영좌 오른쪽에 둔다.3일째 되는 날 사직(社稷)·영녕전(永寧殿)·종묘(宗廟)에 고하고 베로 시신을 싸서 묶는
조선 왕비는 간택(揀擇) 절차를 거쳐 책봉(冊封)되었는데 금혼령(禁婚令)을 공포하여 반가의 13-17세 규수들의 혼인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면 반가에서 사주와 함께 부, 조, 증조, 외조의 이력을 기록한 간택단자(揀擇單子)를 예조에 올리면 예조는 간택단자를 모아 국왕에게 올렸다. 왕비의 간택(揀擇)은 왕실의 어른인 대비(大妃)가 주관하였으며 대비(大妃)는 간택단자(揀擇單子)를 보고 그 중에서 가문과 사주가 좋은 규수를 골랐다. 가례도감(嘉禮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간택(揀擇)과 가례(嘉禮)를 주관하게 하였다.조선 왕세자(王世子)는 동궁(東宮)에 거처하였고 왕비는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揀擇)되어 입궁하였으며 세자빈은 왕세자(王世子)가 왕위에 즉위한 후 정식 왕비에 책봉(冊封)되었고 국왕이 된 후에 국혼(國婚)을 하는 경우도 있다. 왕비의 간택(揀擇),책봉(冊封)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납비의(納妃儀)에 의거하여 시행되었다. 납비의는 택일(擇日),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策妃), 명사봉영(命使奉迎), 동뢰(同牢),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왕비수내외명부조회(王妃受內外命婦朝會)의 절차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