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도(孫貞道)는 1910년 간도에 파견되어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1912년 105인 사건과 가쓰라(桂太郞) 주살 모의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전남 진도에 2년간 유배되었다. 1919년 4월 이동녕 등 동지 30여명과 함께 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하였다.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간사로 이광수·백남칠을 선출한 뒤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선임하였다. 조소앙, 이시영이 초안한 10개조의 헌장과 정강을 심의 통과시킴으로써 4월 11일 임시정부가 내외에 선포되었으며 이동녕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당선되었다. 손정도는 1920년 1월에 김철(金徹)·김립(金立)·윤현진(尹顯振)·김구(金九)와 함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1921년 3월에는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취임하여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1922년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회장을 역임하고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노공부장(勞工部長)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7년에는 간도지방 한국
권동진(權東鎭)은 1906년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에서 만난 손병희(孫秉熙)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교, 도사(道師)가 되었으며 전도에도 종사했다.1918년 11월 일본 오사카 매일신보에 소개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 14개 조항을 읽고 보다 구체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2월에 천도교 측의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과 함께 처음으로 대한광복운동을 발의하여 손병희와 상의하였다. 대한광복운동의 대중화, 대한광복운동의 일원화, 대한광복운동의 비폭력화를 결정한 뒤 이를 거족적으로 펴기 위하여 기독교, 불교 등 각종 종교단체를 망라하는 동시에 저명인사들로 민족대표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1일 태화관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천도교 측 15인 중 한사람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천도교에서 발간하던 잡지 개벽(開闢)의 편집진으로, 또한 신간회의 부회장으로 적극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11.3 대한광복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신간회는 엄중한 경계 속에서 반일시위운동과 대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했
김원식(金元植)은 1907년 7월 이후 강원도 북부의 산악지대에서 항일의병을 크게 일으켰고 화천, 양구, 평강, 김화, 금성, 회양, 인제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20여명의 소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는데,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역을 활용하여 주로 야간과 새벽에 기습전을 펼쳐 일제에 타격을 주었다. 또한 충청도 제천에서 일어나 강원 북부의 금강산 지역까지 북상한 이강년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김원식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1908년 6월 6일 금강산 이북의 흡곡현으로 들어가 헌병주재소를 파괴하고 일제의 문서를 소각하였다. 일본어 학교를 불태우고 관리의 의복을 탈취하였다. 친일 한국인 순사 3명을 붙잡아 그중 2명을 총살하는 등 일제의 대한제국 지배를 돕는 친일 관리와 부호도 함께 처단하였다. 전국에 걸쳐 의병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의병탄압작전에 돌입하여 강원도에서는 인제, 금성, 김화, 회양, 통천 등 강원 북부에 주둔하는 수비대로 하여금 의병을 진압하도록 지시하였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 강력히 저항하였으며 1908년 6월 26일 강원도 금
김성숙(金星淑)은 3·1 대한광복운동 때에는 양주·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무산자동맹 노동공제회에 참여하여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한성 본회 및 각 지방 지회에 알리는 등 적극적으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으며,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중국 베이징에서 광저우 지역으로 옮겨 1928년 한국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하고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성숙은 1936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고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의 편집을 맡았다. 이듬해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2년 1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으로, 1월 26일에는 3·1절기념주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문태수(文泰洙)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 늑결의 비보를 듣고 구국투쟁에 헌신할 것을 각오하고 항일의 거두인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 구국의 방책을 논의하였다. 1906년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과 산포수를 규합하여 덕유산 영각사(靈覺寺)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무주 원통사(圓通寺)로 부대를 이동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전에 들어갔다. 무주 안성(安城)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1906년 9월 박춘실이 거느린 부대를 규합함으로써 군세를 크게 확장하였고 9월 하순 장수로 들어가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전멸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이후 전국 각지를 오가며 60여 회에 걸쳐 일본군을 토멸하는 영웅적인 항전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말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오르자 호남의병대장으로 호남의병 1백여 명을 이끌고 양주로 향하였다. 1908년 1월 말 허위가 거느리는 3백여 명의 별동대가 흥인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공하였지만, 전력의 열세로 패퇴하자 덕유산으로 귀환하여 다시 항일전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1908년 2월 28일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헌병주재소를 습격, 적 5명을 사살하는 전과
양한묵(梁漢黙)은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여 보안회(補安會)를 설립하고 서기로 활동하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해 공진회(共進會)가 설립되자 이에 힘을 보탰다. 1905년 윤효정, 이준과 함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창립하고, 입헌군주제와 관련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호남의 교육발달을 목표로 1908년 창립된 호남학회(湖南學會) 임시회장 및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초기 천도교의 핵심간부로 교단을 운영하며 교리 정리와 체계화에 힘을 쏟았다.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는 등 동학의 근대화에 기여한 것을 비롯하여,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 등 천도교 교리서를 편찬하며 동학의 교리를 근대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교리강습소에서 천도교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많은 천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는 3·1 대한광복운동 당시 많은 천도교인들이 앞장서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는 토대가 되었다. 1919년 2월 20일 권동진으로부터 대한광복운동 계획을 전해듣고 2월 27일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과
계봉우(桂奉瑀)는 홍명학교의 교사가 되어 한국사와 지리를 가르쳤고, 1910년 영생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의 가르침에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고 구국운동에 힘썼다. 1911년 초 북간도로 가족과 함께 망명하여 간민회(간민교육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광성학교(光成學校)의 교사로서, 후에는 학감으로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면서 신한독립사ㆍ조선역사ㆍ오수불망(吾讐不忘)을 편찬했다. 1913년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ㆍ이동휘가 주도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와 권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권업신문(勸業新聞)에 만고의사 안중근전(萬古義士 安重根傳)을 연재했다. 하마탕 후하(後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다가 1916년 11월 하마탕에서 일제에게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3년 간 고향에서 거주제한을 받게 되었다.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 이후 원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철광단에 가입해 단장에 선출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북간도 국민회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상해에 머무는 동안 임시정부 사료수집위원회의 위원과 구국일보(救國日報)의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탁과 함께 임시정
장석천(張錫天)은 광주청년회에서 활동하며 광주시내의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의 조직과 지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1926년 11월 초 광주고등보통학교ㆍ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주축으로 신사상의 보급과 연구, 식민지 교육체제 반대 등을 목표로 하는 성진회가 결성되었다.성진회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 학교에 연구모임이 지속되었고, 1928년 6월 독서회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었다.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장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며 독서회 결성을 후원하고 항일의식 고취와 항일운동 방안을 협의했다.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서 전남지역 단일 청년연맹 조직을 위해 노력했다. 며칠 전 나주역에서 발생한 한ㆍ일 학생 간의 충돌로 광주지역 한일학생 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었고 1929년 11월 3일 11.3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났다. 11월 3일 광주고보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귀가 중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이 발생했다. 일제는 한인 주동학생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착수했으며 이는 광주지역 사회단체 인사들을 자극하였다. 광주지역 사회단체 지도자들과 대책을 협의하고 대한광복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결의했다. 광주고보생들에게 전단을 작성하고 각
안명근(安明根)은 러일전쟁 직후 대한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때에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을사늑약으로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인 교육운동단체였던 안악면학회와 해서교육총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했다. 일제 통감부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켰다. 사촌형 안중근(安重根)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쳤고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를 결행하였다. 1910년 8월 경술늑약 이후 서간도에 한인청년들을 이주시켜 학교를 세우고 교육 후 중국의 무관학교에 보내 독립군 양성, 매국노 이완용ㆍ송병준 처단과 같은 의열투쟁,일본군에 대한 직접적인 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을 구상했다. 신민회에서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각도의 대표를 선정하고 각도별 모금액을 결정했다. 독립운동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먼저 무기를 구입하고 동지를 규합했다. 박만준ㆍ이승길 등의 동지와 함께 안악ㆍ신천 등의 부호를 찾아 1만원 정도의 자금을 거두었다. 황해
이종희(李鍾熙)는 1919년을 전후하여 중국으로 망명 후 대표적인 의열단체로 일제 식민수탈기구의 파괴와 일본 고위관리나 친일파의 처단을 활동목표로 하는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하여 의열투쟁에 동참하였다. 1925년 북경에서 류자명(柳子明)의 지시로 일제의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한 이후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 전환에 따라 1926년 1월 광주(廣州)로 이동하여 10여 명의 의열단원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4기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남창 주둔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남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의열단은 혁명간부 겸 항일투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였고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으로 다수의 청년투사를 양성하여 조직의 위상을 재확립하고 항일운동 역량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의열단은 193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대동단결체 결선운동을 주도하여 1935년 7월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