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수시력(授時曆) 시행 이후 그 계산법을 알지 못하여 빼놓았던 일월교식(日月交食)과 오성(五星)을 추보(推步)하여 보완케 했고, 세종 15년(1433) 정인지(鄭麟趾), 정초(鄭招), 정흠지(鄭欽之), 김담(金淡), 이순지(李純之) 등의 학자들에게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하도록 했다.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은 수시력과 명의 대통력통궤(大統曆通軌)를 바탕으로 하여 오차를 교정하여 역일(曆日), 태양(太陽), 태음(太陰), 중성(中星), 교식(交食), 오성(五星), 사여성(四餘星)의 칠정(七政)과 천행제율(天行諸率), 일행제율(日行諸率), 월행제율(月行諸率), 일월식(日月食)의 한도 등에 대하여 서술했는데, 세종 24년(1442)에 완성되어 세종 26년(1444)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은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 편찬된 뒤 회회역경통경(回回曆經通經)과 가령역서(假令曆書)를 개정 · 증보하였으며 그 내용은 태양(太陽), 태음(太陰), 교식(交食), 오성(五星), 태음오성릉범(太陰五星凌犯) 등으로 나뉘어져 내편(內篇)의 칠정(七政)과 다른 것으로, 내편(內篇)은 2권 2책이었으나 외편(外篇)은 3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달력은 한성의
서원(書院)은 명목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선현을 제사지낸다는 설립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지방 사족(士族)의 지위를 강화해 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사화(士禍)로 말미암아 향촌에 은거하여 생활하던 사림(士林)의 활동 기반이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급속히 발전하였다.서원(書院)은 유학의 성현들을 모시는 사당 또는 사묘(祠廟)의 역할, 향약(鄕約) 등의 향촌 질서를 정하고 백성들을 계도하는 역할, 단순한 교육이 아닌 학문 연구와 발전의 기능을 하는 연구소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향촌의 사림(士林)을 결집하는 역할도 하였다.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었고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서원이 생겼으며, 1550년(명종 5년)에는 퇴계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책·노비·전결(田結) 등을 주어 장려하였으며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어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대에는 1백 24개, 숙종 대에는 1도에 80 ~ 90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서
[더타임즈] 4학(四學)은 동(東) · 서(西) · 남(南) · 중학(中學)의 총칭으로서 조선 초기에는 4부학당(四部學堂)이라 하였다. 동(東) · 서(西) · 남(南) · 중부유학(中部儒學)으로도 불리우다가 세조 12년(1466)의 관제(官制) 개혁 때 동 · 서 · 남 · 중학으로 개칭되었다. 태종 5년(1405) 한양으로 천도하고 국가의 지도이념인 유학의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동 · 서학당 외에 남부학당(南部學堂)이 태종 11년(1411) 6월에 설치되었고 그 해 10월 4부학당 중에서 최초로 남부학당의 독립적인 학사(學舍)가 한성부 남부(南部) 성명방(誠明坊)에 건립되었다.세종 4년(1422) 12월 중부학당의 독립 학사가 한성부 북부(北部) 관광방(觀光坊)에 신축되었다. 서부학당(西部學堂)은 처음에는 한성부(漢城府) 북쪽에 편재해 있던 경고(京庫)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생도들의 아침 · 저녁 왕래가 크게 불편하였기 때문에 세종 17년(1435)에 이르러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에 독립 학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불사(佛寺)를 이용하고 있었던 동부학당(東部學堂)은 세종 17년(1435) 8월 경술(庚戌)에 동부학당을 보수하도록 명
시험 결과에 대한 전형(銓衡)이 끝나면 소과(小科) 급제자(及第者)의 성명을 성적순으로 써서 국왕에게 입계(入啓)하는 동시에 급제자(及第者)의 명단을 발표하는 괘방(掛榜)을 하고, 길일(吉日)을 택하여 전정(殿庭)에서 창방의(唱榜儀) 또는 방방의(放榜儀)라 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시신(侍臣)과 사관(四館)의 참하관(參下官)들이 시립(侍立)한 가운데 거행되었고 생원(生員)은 동정(東庭), 진사(進士)는 서정(西庭)에 정열하여 국왕에게 사배례(四拜禮)를 올린 뒤 소과(小科)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받았다. 소과(小科) 급제한 생진사도 문과 급제와 같이 어사화를 꽂은 급제자들이 말을 타고 천동 (天童)을 앞세워 악수(樂手)가 음악을 울리며, 광대가 춤을 추고 재인(才人)이 온갖 재주를 부리면서 3 - 5일 동안 시가를 행진하는 유가(遊街)를 하였다. 생진사들은 생원(生員)의 장원집에 모여 그 인솔 아래 대궐에 들어가 국왕에게 사은(謝恩)하고, 다음날에는 진사(進士)의 장원집에 모여 그 인솔 아래 문묘(文廟)에 가서 알성(謁聖)하였으며 문희연(聞喜宴)이라 하여 친척 · 친지를 불러 잔치를 베풀고, 시관(試官)들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었다
성균관 유생의 특별시험 황감제 황감제(黃柑製)는 해마다 동짓달이나 섣달에 제주 목사(牧使)가 귤 · 유자 · 감 따위의 특산물을 진상(進上)하면 그 일부를 성균관(成均館)과 4학(四學)의 유생(儒生)들에게 나누어 준 뒤 어제(御題)를 내려 고시(考試)하여 거수자(擧手者)에게 급제(及第)를 준 것인데 1564년(명종 19)부터 시행되었다.그 고시절차를 보면 대제학(大提學)이 패초(牌招)를 받고 입궐하여 시제(試題)를 적어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는다. 대제학(大提學)은 승지 및 중사(中使)와 함께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으로 가는데 승지(承旨)는 어제(御題), 중사(中使)는 귤을 가져간다. 명륜당(明倫堂)에 도착하면 어제(御題)는 북벽의 서안(書案) 위에, 귤은 상 위에 봉치(封置)한다. 중사는 동벽의 수좌(首座)에 앉고 승지는 그 다음에 앉으며, 대제학과 본관 당상관(堂上官)들은 중사 및 승지와 서로 읍례(揖禮)한 뒤에 서벽에 앉는다. 대제학이 무릎을 꿇고 승지 앞에 나아가 어제를 받아 제자리에 돌아가 앉는다. 대제학 · 본관 당상관 · 중사 및 승지에게 귤 5개씩, 제 낭청(郞廳)에게 2개씩을 나누어 주고 양재(兩齋) 재임(齋任)과 거재(居齋) 유생에게 1개
조선 건국 후 국가최고회의기관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권한이 너무 강대하므로 태조는 도평의사사의 병권(兵權)을 분리하여 삼군부를 설치하고 태조가 가장 신임하는 정도전(鄭道傳)을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에 임명하여 병권을 맡기고 한양 천도 후 경복궁을 창건하고 광화문 앞 동쪽 첫머리에 문직 최고기관인 도평의사사를 짓고, 서쪽 첫머리에 삼군부를 지었다. 태종 대에 도평의사사를 의정부(議政府)로 개칭하고 삼군부를 폐지하자, 도평의사사 건물을 의정부가 그대로 사용하고, 삼군부의 건물을 예조가 사용하였다.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은 1864년 2월 비변사(備邊司)의 권한을 줄이기 위하여 비변사를 의정부(議政府)와 비변사로 나누어 비변사는 국방과 치안만 관장하게 하였고 1865년 3월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이것을 의정부(議政府)에 합하였다가 1865년 5월 다시 군(軍) · 정(政)을 분리하여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였다. 삼군부(三軍府)를 복설(復設)하자 국초(國初)와 같이 예조 청사를 삼군부 청사로 삼고, 예조는 광화문 앞 동쪽 이조와 호조 중간에 있던 한성부(漢城府)로 옮기고 한성부는 훈국신영(訓局新營)으로 옮겼다. 삼군부의 직제는 영삼군부사(領三軍府
조선시대 한성(漢城) 5부(五部) 내의 포도(捕盜),순라(巡邏) 등 치안(治安) 업무에 중심 역할을 하였던 기관은 좌포도청(左捕盜廳) · 우포도청(右捕盜廳)이었다.우포도청(右捕盜廳)은 혜정교(惠政橋)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좌포도청(左捕盜廳)은 파자교(把子橋)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한성(漢城) 5부(五部)의 치안 업무를 담당하였다. 1894년 7월 14일 설치한 경무청(警務廳)의 책임자 경무사(警務使)는 내무대신의 지시를 받아서 한성(漢城) 5부(五部) 내의 경찰 업무와 감금 업무(監禁 業務)를 수행하되 범죄의 경중을 구분하여 법사(法司)로 이송(移送)하는 모든 일을 관장하였고 한성 5부(五部)에 경찰지서(警察支署)를 두었으나 1895년 경무지서를 경무서(警務署)로 하였다. 경무서의 서장은 경찰 사무를 관장하여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고 관할구역 내를 순시하며 민정 시찰과 부하의 사무 집행을 감독하고 부하직원에게 상부 명령과 경무 법규를 주지시키고 주무관(主務官) · 군(郡) · 읍(邑) · 동장(洞長) 및 기타 관계 관청과 문서 왕복을 할 수 있으며 서장이 유고시에는 수석 총순(首席 總巡)이 서장을 대리하였다. 총순(總巡)은 순검의 행의(行儀)와 복장을
요즘 여당 내에서 개헌바람이 좀 부는 모양이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물론 원내수석부대표인 이군현 의원마저 ‘국회차원 개헌특위구성’을 외치고 있으며, mb마저 “내가 대통령 해보니, 권력 너무 집중 돼 있어”라며 바람을 잡고 있다. 이를 보면, 분명 친이세력 중심으로 벌써 개헌움직임이 본격화 된 양상이다. 태풍 철도 지나고 배추 값도 정상적으로 되돌아오는 요즈음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 하는 자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세상이치 모든 것이 자업자득인 것을 알면, 얕은 잔꾀 부려봐야 아무 소용없음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이제는 국민 대부분이 반대하여 권력조차 위태로운 4대강 사업의 강행보다 권력에서의 하산 길이 두려운지 차기 대통령의 권력 범위를 결정짓는 개헌에 올인하는 모습이다. 레임덕을 넘어 참으로 가련한 한 무리의 오리 떼를 보는 것 같다. 그만큼 그들은 차기 대권 승리자로 가장 유력시 되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벌써 견제해가며 대통령 권력 힘 빼기에 들어간 느낌이다. 즉, 강력한 대통령제에서 이원집정제로 개헌하여 다음 정권 하에서도 자신들이 권력을 반쯤 좌지우지하겠다는 포석으로 읽힌다. 때문에 4대강과 개헌을 야당과 맞바꾸겠다고 권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천고마비의 병인년도 결실의 계절을 맞아 분주한 가운데 금치의 재료인 배추 값도 차츰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아울러 차기 대선도 이제 겨우 2년여 남았다.박근혜 전 대표는 이제 물러설 수 없다. 이에 차기 대권 도전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삼아 조금의 실수도 없이 새로운 도전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할 때다.그러기 위해서는 당내 경선부터 꼼꼼히 준비해야한다. 지난 한나라당 경선 때를 보아도 박 전대표의 준비는 이명박 후보보다 수개 월 가량 늦게 출발했다. 당시 이 후보가 ‘희망세상21산악회’가 움직인 지 한참 후에야 서청원 대표의 ‘청산회’가 계룡산에서 전국적인 첫 모임을 가졌다. 이처럼 전국의 주요지역에서 후발주자가 됨으로써 박후보 측은 출발부터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는 경선 패배의 첫 패착이었다. 때문에 차기 대권 도전을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 유능한 인재들을 당내 경쟁 후보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 미리 움직여야한다. 물론 경제적 부담도 상당하겠지만 박 전대표에게는 전국적으로 자발적인 지지단체가 수없이 많기에 이는 그 어느 후보보다도 유리한 점이다.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천혜의 자
민선5기 강운태 광주광역시장이 내건 「세계속의 인권․평화 공동체」구상을 접하며 마음속에 무언가 뜨거운 염원이 꿈틀거린다. 한가위를 맞이하여 모든 이웃들에게 사랑과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계속의 인권․평화 공동체」를 구현하는 강운태시장의 구상에 앞서, 「광주속의 인권․ 평화 공동체」가 먼저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녀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멀어져버린, 숨 쉴 힘조차 없고 울음소리조차 낼 수 없는 소외계층과 취약계층을 찾아 내, 사회와 화해하고 통합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인권을 존중해 주고 따뜻한 배려와 아름다운 동행을 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성폭행, 성매매․유기 등의 학대와 가정 내 폭력, 학교 폭력 등으로부터 우리의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고 우리 아이들 전체의 ‘행복한 삶의 질’ 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노인인구의 증가로 가족구성원간의 갈등, 질병, 치매 등으로 인한 경제적 빈곤이나 건강의 문제는 우리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커다란 사회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노인들의 일자리 창출과 사회에 적응 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