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는 7인 동맹을 맺고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거사를 계획하였다.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일본의 전 총리이자 1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의 코콥체프와 회담을 하기 위해 하얼빈역에 도착했다.이토 히로부미가 9시 15분 하얼빈 역에 도착해 차내에서 20분 정도 코콥체프와 얘기를 나눈 후 명예 사령관으로서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이 총 3발을 쏴 이토 히로부미를 명중시켰고 다시 총 3발을 쏴 일본 관리들을 쏘았다. 수행원인 무로다(室田義文), 나카무라(中村是公) 등은 깜짝 놀라 이토를 보호했고 안중근은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뒤 러시아 군대에게 잡혔다. 이토는 당했다라고 한마디하고, 확실히 3발 맞았다. 상대는 누구냐라고 물었다. 수행원은 우선 이토를 차내로 옮기고 이토가 좋아하는 브랜디를 한잔 따라 건네주었다.이토가 지팡이를 꼭 잡고 있어서 무로다가 지팡이를 빼내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범인이 한국인으로 이미 체포되었다는 것을 알리자 바보 같은 놈
김문기(金文起)는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30년 예문관 검열(禮文館 檢閱), 1436년 사간원 좌헌납(司諫院 左獻納)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고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1450년 병조 참의(兵曹 參議)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형조 참판(刑曹 參判)에 제수(除授)되었다가 다시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나갔다. 김문기는 1455년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工曹判書 兼 三軍都鎭撫)에 임명되었으며 1456년 단종(端宗) 복위(復位)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단종(端宗) 복위(復位)에 가담한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死六臣)이라 했으며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류성원(柳誠源)·김문기(金文起)·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 사육신(死六臣)은 복관(復官)되었고 김문기는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려졌고 백촌유사(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한명회(韓明澮)는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의기투합하여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했다.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 때 심복 참모로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軍器錄事)에 임명되고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의 호를 받았다. 사복시소윤(司僕寺少尹)이 되었다가 1454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부승지로 승진했으며, 그해 가을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우승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저지시켰으며, 사육신의 주살(誅殺)에 적극 협조했다. 이어 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었다.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지고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했으며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다.1466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유교명(遺敎命)을 받들어
독도(獨島)는 하나의 섬이 아닌 2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졌으며 동도의 면적은 7만3297㎡이고, 서도의 면적은 8만8639㎡로 서도의 면적이 조금 더 넓다. 독도(獨島)는 우산도(于山島), 자산도(子山島), 삼봉도(三峰島), 요도(蓼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지만 우리의 고유한 영토이다. 신라 지증왕 13년(512)에 이사부(異斯夫)가 울릉도와 우산도, 죽서도(竹嶼島), 관음도를 아우르는 우산국(于山國)을 편입한 이래로 우리나라의 영토가 되었고 조선 초기에는 독도를 우산도ㆍ요도ㆍ삼봉도 등으로 불렀으며 성종1(1470)년에 함경도 영흥(永興)에 사는 김자주(金自周)가 섬을 관찰해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삼봉도(三峰島)라 불렀다. 조선 태종 대에 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워 두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취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의 어부들이 울릉도(鬱陵島)에서 불법적으로 고기를 잡아갔다. 안용복은 40여 명을 이끌고 울릉도에 들어가서 일본 어부들을 몰아내고 일본까지 나아가서 일본으로부터 다시는 울릉도에 오지 않겠다는 약속과 독도와 울릉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서류까지 받아 왔다. 독도를 자산도(子山島)
방정환(方定煥)은 1919년 3월 1일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직접 등사판으로 찍은 독립신문을 발행하여 중학생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1919년 말, 일본 도쿄의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 문학과 아동 심리학을 공부했다.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을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계급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을 연재하였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1921년에는 일본 유학 기간동안 외국동화를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1921년 한성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방정환은 자신의 특기인 재미있는 구연동화로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였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잡지를 선전하였던 것이다.어린이는 이원수, 마해송 선생 같은
편강렬(片康烈)은 을사늑약 늑결 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07년 영남 지역 의병장으로 당시 강원도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이강년의 부대에 입대했다. 굉장한 거구이며 힘이 장사였고 능력과 기백을 보여 이강년에 의해 발탁되었고, 한성부 진격을 위해 이강년과 허위, 신돌석의 의병 부대가 집결한 양주 전투에 참가했지만 일본군의 공격에 패퇴했다.1910년 평양의 기독교 계열 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숭실학교 재학 중 안명근을 중심으로 황해도 및 평안도 지역 항일 인사들이 대거 체포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감옥에서 3년간 복역했고,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무렵에는 황해도 지역에 항일유격대를 건설하려 한 구월산주비대 사건으로 다시 1년여 기간 동안 복역했다. 간도로 피신하여 장춘(長春)의 일본 적십자병원을 습격하고 펑톈에서는 시가전을 감행하고 길림(吉林)의 일본기관을 습격하었다. 화이더현(懷德縣)의 우자쯔(五家子)에서 항일 무장 단체인 의성단(義成團)을 양기탁, 남정과 함께 조직해 단장을 맡았다. 250명의 회원을 보유한 의성단(義成團)은 훈련 기관까지 갖추고 주요 기관에 폭탄을 던지는 테러 행위와 함께 일본군과 직접 시가전을 벌이는 등의
이종무(李從茂)는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강원도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고, 1397년 옹진에서 만호(萬戶)의 벼슬에 재직중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가 돌아와 상장군이 되었다. 1400년 2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 1406년 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고,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세종 원년 1419년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군함 227척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복하였다. 1419년 음력 6월 19일 이종무가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로 향하였다. 6월 20일 오시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두지포에 내려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적선 129척을 빼앗고, 가옥 1993호를 불태웠으며, 중국인이 포함된 포로를 구출하였다.이 공으로 이종무는 장천군(長川君)에 봉해졌다.끝없는 탄핵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으며 한성 밖에서 거주하게 된다.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
최윤덕(崔閏德)은 1419년(세종1년) 조선의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탈이 계속되자 5월 14일에 조정에서 대마도의 정벌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해 음력 6월 19일 장천군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삼고, 영의정 유정현을 3도도통사로 하고, 참찬 최윤덕을 3군도절제사로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하였다.6월 20일에 선발대가 대마도에 상륙한 이후 본대가 뒤이어 상륙하여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수색하고 근거지를 소탕하자 왜구들이 산으로 달아나 방어하였다. 이에 26일에 왜구와 결전을 위해 전진하던 중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후퇴하였다. 최윤덕이 중요 길목을 차단하니 보름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항복을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시켰다. 항복을 받은 지 7일 만인 7월3일 거제도로 개선하였다.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이러한 포용정책으로, 오랜기간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2년(세종14년) 12월 9일에 평양감사의 보고에 야인이 경계에 침입하여 사람과 물건들을 약탈해가니 강계절제사 박초가 추격하여 사
정철(鄭澈)은 1561년(명종 16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1567년(명종 32년)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를 하였다.1568년(선조 1년) 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다. 1578년 장악원정으로 기용되고, 사간·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다.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였다.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된 후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작품을 썼다. 관동별곡은 관동팔경을 두루 유람하면서 산수(山水)를 노래하고 또한 고사(故事)·풍속까지 삽입한 것이며, 훈민가(訓民歌) 16수는 백성을 교화(敎化)할 때 포고문이나 유시문을 대신하여 시조(時調)의 형식을 빌려 지은 것이다. 1583년(선조 16) 예조 참판이 되고, 이어 형조와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논척(論斥)으로 다음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가사 생활에 들어갔다.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1589년(선조 22년) 우
류성룡(柳成龍)은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156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대비가 죽었을 때 류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 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았다.1590년 예조 판서,이조 판서,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 문제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이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하여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1591년 선조가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