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면(李載冕)은 1864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위 관직을 거쳤다.1882년 12월 청나라에 유폐중이던 아버지 흥선헌의대원왕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헌의대원왕을 봉양하였다.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은 운현궁의 폭탄 테러 사건을 명성황후가 흥선헌의대원왕을 폭살하려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흥선헌의대원왕의 사랑채와 이재면의 거처에도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으나 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각되었다. 1893년 동학 농민군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흥선헌의대원왕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정교는 흥선헌의대원왕이 은밀히 동학교도들을 한성으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이재면의 아들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고 하였다. 대한제국 건국 이후 1900년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이두황(李斗璜)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 우선봉으로 공주전투에서 전봉준부대를 이인역(利仁驛)에서 격퇴하고, 전주를 탈환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이어 청일전쟁에 참전하여 통역과 정찰활동을 했다. 1895년 양주목사가 되었다가 일본인이 교관인 훈련대 2대대장이 되었다. 그해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친러,반일 정책을 취하는 명성황후를 일본 낭인패와 군을 동원하여 학살한 명성황후 살해사건에 훈련대를 이끌고 광화문의 경비를 맡았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책임을 물어 정부에서 훈련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김홍집 이하 대신들을 해치려고 했으나, 부대가 해산되자 피신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조 광무제가 이두황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으로 피신해 일본 정부의 비호하에 생활했다. 1907년 순종 융희제가 황제위에 오른 뒤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특사를 단행하자 귀국하여 중추원 참의가 되고, 이듬해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었다. 한일 강제합병 뒤 전라북도 도장관으로 재직했다.
우범선(禹範善)은 1876년 무과 시험에 급제한 뒤 황해도 지역에 배치 받아 근무하다가,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되었고 별기군에 참여하면서부터 일본을 배후로 둔 개화 세력과 가깝게 지냈으며 명성황후와 대립하여 귀양살이를 하기도 했다.1894년 일본군이 명성황후 세력을 실각시킨 뒤 개화파가 집권하자 군국기무처에서 갑오개혁에 참여했으며, 1895년 일본의 주도로 훈련대가 창설되었을 때 이두황, 이주회 등 친일파 군인들과 함께 대대장을 맡았다. 명성황후의 반일, 친러 노선에 반발한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는 훈련대의 간부들과 함께 명성황후 살해 계획을 세웠다. 우범선은 훈련대 군인 동원의 책임자였으며 명성황후의 소각된 시신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과정에도 가담했다.이듬해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김홍집 내각이 몰락하여 일본으로 피신했다. 도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사카이 나카를 만나 혼인하였다. 혼인 후 1903년 구레로 이사한 뒤 집들이를 하던 날 망명해 있던 고영근에게 암살되었다.
윤효정(尹孝定)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탁지부주사로 근무하였고, 1898년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 음모사건에 관련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고베에서 박영효·우범선과 조일의숙을 세워 한국의 유학생을 수용하였다. 윤효정이 우범선과 교제하며 그가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관련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고영근을 시켜 우범선을 살해하였다. 귀국하여 1905년 이준·양한묵 등과 헌정연구회 입헌정치체제를 연구하였고, 1906년 장지연 등과 헌정연구회를 토대로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협회회보·대한민보를 간행하여 일제의 통감정치와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에 맞섰다. 1931년부터 동아일보에 풍운한말비사를 연재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홍만자회(紅卍字會) 한국지부의 일을 맡아보았다.
최석민(崔錫敏)은 의정부와 내각의 관리로 일하다가 지방의 군수로 오랫동안 근무했다. 최석민은 관제 정비와 지방 제도, 세금 분야 등의 실무 전문가로 점차 고위직에 올랐다.1906년 내부협판(內部協辦) 및 지방세조사위원에 임명되었고, 1907년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대한제국 황실의 국유 재산을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 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恩賜公債) 2만 5천원을 받았다. 남작(男爵) 작위는 전직 관료에게 주어졌으나, 그는 칙임관(勅任官) 1등 이상의 현직에 재직을 기준으로 이 작위를 수작했다.1911년 경술늑약 늑결 1주년을 기념하는 축사를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이용구(李容九)는 1905년 11월에 일진회의 명의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2월에 일진회의 회장이 되었다. 1906년 9월 시천교(侍天敎)를 세우고 교조가 되었다. 1907년 5월 일진회의 이름으로 정부의 국채보상운동,반을사늑약운동을 추궁하여 내각의 사퇴를 주장하는 탄핵문을 제출했다. 같은 해 6월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진회원을 동원하여 고조 광무제의 퇴위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정미늑약과 군대 강제 해산에 반대하는 정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11월 무장조직인 일진회 자위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군 탄압에 앞장섰다. 1909년 12월 일본의 배후조종에 따라 일진회 임시총회에서 한국황실을 영구히 안전하게 할 것, 한국정부를 폐지하고 일본정부가 직접 정치를 할 것, 통감부를 폐지할 것, 일진회를 제외한 다른 단체는 해산할 것을 결의, 일진회 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어 한일합병을 주장하는 글을 순종 융희제,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소네 통감에게 보냈다. 경술늑약이 늑결되자 일제로부터 은사금 10만 엔을 받았다. 1910년 9월 일진회가 해산명령을 받고 일제로부터 외면당하자 매국행위에 대한 민중의 반감을 피해 일
황학수(黃學秀)는 1898년(광무 2)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참위로 임관된 뒤, 친위대 및 시위대 소대장을 거쳐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교관, 안동진위대장,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 교관을 역임했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고향으로 내려가 지방유지들과 협력,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 의원, 군무부 비서국장 등을 지냈다. 임시정부가 분열되자 무장독립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간도로 건너가 1925년 북간도의 독립군정부인 신민부(新民府)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에는 김좌진(金佐鎭)의 뒤를 이어 참모부위원장 겸 군사위원장이 되어 활약했다. 1928년 3부통합회의에 신민부 대표로 참석했으나, 3부가 통합되지 못하고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양분되자 혁신의회의 중앙집행위원·군사위원장에 취임했다. 1930년 2월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홍진(洪震)을 중심으로 이청천(李靑天)·신숙(申肅)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그 산하의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이 되어 항일전투를 지휘했다. 만주사변 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간부들과 함께 중국
이근택(李根澤)은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하여 발탁되었다. 명성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1884년 무과에 급제한 후 단천부사·길주목사 등을 지내고 충청도 수군절도사·병조참판을 역임한 후 1897년 친위연대 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음모하다가 제주도로 귀양갔다. 이근택은 1898년 돌아와 한성 판윤·의정부 찬정 등을 거쳐 1905년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을사늑약(乙巳勒約) 늑결에 찬성하여 을사오적으로 지탄받았다.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에 협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子爵)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에 임명되었다.
이지용(李址鎔)은 188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으며, 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냈다. 1903년 10월 무렵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힘썼으며, 1904년 2월 외부대신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 엔을 받고 한일의정서 조인에 협조했다. 이지용은 법부대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거쳐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찬성, 늑결(勒結)함으로써 을사오적의 하나가 되었다.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勒結)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에 임명되었으며 정 3위 훈 1등으로 1928년 사망했다.
권중현(權重顯)은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교장 임시 서리가 되었고, 1903년에는 육군법원장에 임명되었다. 1904년에는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다. 철도원 총재 임시 서리도 겸했다.1904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 위문사로 파견되는 등 일본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대수장을 받았다.1905년 농상공부대신으로서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을사오적이 되었다. 을사오적에 포함된 뒤 1907년 나철의 을사오적 암살단과 강원상의 암살 목표가 되었다. 이후 군부대신을 지내면서 의병 진압 명령을 내리며 정미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1908년 일본 정부가 내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이 늑결(勒結)된 뒤 10월 16일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恩賜公債) 5만원을 수령했다. 총독부 중추원 고문(中樞院 顧問)과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냈다.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정5위에 서위되었으며, 1915년에는 다이쇼대례기념장이 서훈되고 1918년에 종4위로 승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