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는 1874년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의 2남으로 태어났으며 1875년 조선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1898년 김홍륙(金鴻陸)이 고조 광무제와 황태자에게 해를 가할 목적으로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넣었는데, 고조 광무제는 맛이 이상함을 알고 곧바로 뱉었으나, 순종 융희제는 다량을 복용하여 치아가 망실되고 혈변을 누는 등 심한 몸살을 앓았다.1907년 고조 광무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고 일제 통감부와 정미칠적의 강박으로 강제로 황제위에서 퇴위되었으며 순종 융희제는 일제 통감부에 의해 황제위에 등극하였다. 1905년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에서 서양 강대국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대한제국 강제 합병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일제 통감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에게 하얼빈에서 저격당하였다.1910년 8월 일제는 조약 체결권자인 순종 융희제에게 경술늑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순종 융희제는 경술늑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
홍계훈(洪啓薰)은 무예청 별감으로 관직을 시작하였으며 1882년 8월에 일어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업고 피신시킨 공으로 출세하였다. 1894년 장위영 영관(領官)을 지냈다. 그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출전하여 전주를 탈환하고 그 공으로 훈련대장이 되었다.1895년 미우라 주한 일본공사의 명성황후 살해사건 때 경복궁 광화문 안에서 일본군의 침입을 저지하다가 총을 맞고 죽었다. 홍계훈은 미우라 공사의 명성황후 살해사건 때 명성황후를 지키다가 죽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더불어 1900년 장충단에 제향되었다.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홍계훈이 미우라 일본 공사의 명성황후 살해사건 때 일본군의 총을 맞고 쓰러진 뒤 며칠 뒤에 죽었으며 인품이 염결(廉潔)하고 근신(勤愼)했다고 하였고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들에서 일본군 장교의 칼에 찔린 뒤 8발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썼다.
정여립(鄭汝立)은 1570년(선조 2)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에 올랐다. 서인으로 이이와 성혼(成渾)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성혼·박순(朴淳)을 비판하여 서인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고 선조의 눈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1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1587년에는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大同契)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1589년 한강이 언 틈을 타서 입경, 대장 신립(申砬) 등을 죽이고 병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의 고변(告變)으로 관련자들
한백겸(韓百謙)은 1586년(선조 19) 천거로 관직에 올라 중부참봉(中部參奉)·경기전(慶基殿) 참봉·호조좌랑·형조좌랑을을 지내다가 외직인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발령받아 2년간 근무하다가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강원도 영월군수에 부임했다.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 때 연좌되어 귀양갔다. 임진왜란 때 석방되어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하여 난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으로 내자직장(內資直長)이 되었다. 1602년 청주목사를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다.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와 호조 참의를 지냈다.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였을 때 대신들은 한백겸이 예(禮)에 밝다 하여 빈전(殯殿)의 모든 상례(尙禮)를 맡겼다.1612년 파주목사에 발령되었으나 벼슬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한다. 1615년 명저인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저술하였다.
허준(許浚)은 1569년 6월 부제학 류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였다.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과 류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서 출사했으며, 1570년 류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한성에서 고관대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명성을 높였다. 종4품 내의원 첨정에 오른 이후 뛰어난 의술로 조선 왕실의 병을 고쳐 내의(內醫)로서의 명성을 높였다.1573년 정3품 통훈대부 내의원정에 올랐다. 1575년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 어의(御醫)로 임명되었다.1578년 9월 허준은 내의원 첨정으로 있을 때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선물로 하사받았다. 1587년 심신이 허약해진 선조의 건강이 회복되어 수고로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다.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김씨의 남동생을 진료하여 완쾌시켰고, 1590년 허준이 왕자 신성군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건강을 돌본 공로로 허준은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6년 광조의 병을 맡게되어 이를 고친 공로로 허준은 정2품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문하에서 일생 동안 사사하면서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 주류의 계통화는 조선 역사의 체계적 파악 가능성을 높였다.동사강목 (東史綱目)등을 저술하여 과거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내세웠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시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경고하였다. 이익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을 수정 가필하고 요령있게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이라는 대작을 편찬하였다.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 진력하였다. 영조 25년(1749)에 만령전(萬寧殿) 참봉(參奉)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감찰·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그의 학문은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어울려서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인 정립을 모색하여 갔다. 이러한 사상적 성과는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30권 15책을 비롯한 많은 저술로서 집대성되었다.
이익(李瀷)은 1705년(숙종 31년) 증광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의 형 이잠(李潛)이 당쟁으로 희생된 후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몰두하여, 류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특히 천문·지리·의약·율산(律算)·경사(經史)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1727년(영조 3년)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으로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서학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천문략(天文略), 천주실의(天主實義), 주제군징(主劑軍徵), 칠극(七克), 진도자증(眞道自證) 등을 연구하였다.그는 평생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광주 첨성리(瞻星里)에 머물러 학문을 연마하였으나 항상 국가 부흥을 위한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저술하여 불교와 세유(世儒)의 실용적이지 못한 학풍을 배격하고 실증적(實證的)인 사상을 확립시켰다. 역사 서술의 태도에서도 종래의 방법을 버리고 비판적·고증적(考證的)인 파악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당쟁의 폐단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투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양반이 실제적인 산업에 종사하지 않고 관직을 얻음으로써 재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한정된 직제(職制)에 비해 너무 많은 수의 관리가 배출되므로 자연히 당파
류형원(柳馨遠)은 1654년 진사시에 급제했지만, 당시 과거제의 폐단이 극심한 것을 보고 이후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뒤 고금의 전적 1만여 권을 보면서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그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악습을 제거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원하는 실학적인 목적을 추구했다. 따라서 종래에 소홀히 되었던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어학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정치·경제 문제의 연구에 힘썼으며, 국방을 위해 군사학도 연구했다. 류형원의 주저(主著)로서 26권 13책으로 되어 있는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전면적 개혁에 의한 국가재조책을 제시한 저술로, 전제(田制:토지제도, 재정·상공업 관계) 4권, 교선지제(敎選之制:향약·교육·고시 관계) 2권, 임관지제(任官之制:관료제도의 운용 관계) 1권, 직관지제(職官之制:정부기구 관계) 2권, 녹제(祿制:관리들의 보수 관계) 1권, 병제(兵制:군사제도의 운용, 축성·병기·교통·통신 관계) 2권과 각권의 고설(攷說)을 비롯해 속편(의례, 언어, 노예, 적전[籍田] 기타)과 보유(補遺:군현제)로 구성되어 있다.
채제공(蔡濟恭)은 1743년(영조 19년) 문과 정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수찬(修撰) ·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747년(영조 23년) 익릉별검을 거쳐, 1748년(영조 24년)에는 승문원에 들어갔다. 같은해 가주서로 한림회권에는 참가할 수 없었으나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이권(二圈)을 더하여 소시(召試)에 응하도록 하여 뽑히도록 하는 등 특은(特恩)을 입었으며 이것으로 쳥요직인 예문관검열이 될 수 있었다. 1753년(영조 29년) 호서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균역법의 시행을 조사하고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이후 홍문관수찬,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사헌부집의를 거쳤고 특히 세자(世子)의 학문정진에 대한 많은 건의를 하였다. 1755년(영조 31년)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으로 활약하였고, 그 공로로 승정원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열성지장(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영조 34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세자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목숨을 걸고 이를 극력 막아 철회
이서구(李書九)는 1774년(영조 50)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을 거쳐 지평·초계문신에 선발되었고, 1786년 홍문관에 들어갔다. 모역사건과 천주교도를 옹호한다는 죄로 한때 유배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어 대사성·대사간·이조판서·호조판서·대사헌·우의정을 지냈고, 1825년 판중추부사로 재직하다가 죽었다.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문장을 배웠는데, 4가시인(四家詩人)인 이덕무·류득공·박제가 등도 박지원을 따르며 배웠다. 이서구는 사가시인 가운데 유일한 적출이었고 벼슬도 순탄했다. 과거의 고문(古文)만을 추종하는 데서 벗어나 당대의 문장을 중시하며 그 속에서 고의(古意)를 찾았다. 문장은 간단하고 쉬운 것을 귀하게 여기고 복잡한 것은 천하게 여겼다. 고문은 요약하여 기술했으나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정조가 문제삼은 문체의 타락은 세도(世道)의 타락과 직결된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의(理義)와 사실(事實)을 통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는 혁신적이거나 현실적이기보다는 대개 관조하는 자세로 주위의 사물을 관찰하며 고요함을 얻으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