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 의식을 행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태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고, 태조 4년(1395) 정월부터 공사를 착수하였다. 사직에 올리는 중요한 제사는 4대향(四大享)이라 하여 풍년을 빌기 위해 정월 상순 신일(辛日)에 지내는 제사인 기곡(祈穀), 2월과 8월의 상순 무일(戊日)에 행하는 중삭(中朔), 동지 뒤의 셋째 술일(戌日 또는 未日)인 납일(臘日)에 한 해 동안 지은 농사 형편을 신에게 고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인 납향(臘享)이 있었고 홍수나 한파, 유행병과 전쟁에 행하는 기제(祈祭)·책봉(冊封)·관례(冠禮)와 혼례(婚禮)에 행하는 고제(告祭)의 소사(小祀) 등이 있었다. 사직단(社稷壇) 주변에 동ㆍ서ㆍ북쪽 산기슭을 따라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신실 등은 모두 불타버려 선조 말년에 수복(修復)되었고 신문(神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단(社壇)은 동
수표(水標)는 청계천의 물의 높이를 측정하기 위해 6각 방추형 돌로 만든 하천 수위계(水位計)이다. 조선 세종 대에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강우량을 측정하고 청계천과 한강에 수표를 설치하여 수위를 재도록 하였다. 세종 대의 한강변의 것은 바윗돌에 직접 눈금을 새긴 것이고, 청계천의 것은 마전교(馬廛橋) 서쪽에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청계천의 수표는 성종 대에 화강암 사각기둥에 눈금을 새겨 계량한 것이며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올려져 있고 아래에 직육면체의 초석이 땅 속 깊이 박혀 있다. 수표석(水標石) 아래에는 ‘계사경준(癸巳更濬)’, 또 초석에는 ‘기사대준(己巳大濬)’이라고 청계천(淸溪川) 바닥을 걷어낼 때 바닥까지 흙을 쳐냈음을 밝히는 기록을 음각했으며 현재의 수표는 그 상한이 성종 대가 되고, 그 하한이 기사년 즉 영조 25년(1749)이 된다. 돌기둥 양면에는 1척에서 10척까지 1척(21.5㎝)마다 눈금을 새기고, 3․6․9척에는 O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라고 표시하였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 수위(水位)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보아
정업원(淨業院)은 조선 6대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단종의 명복을 빌면서 살던 곳이다. 정순왕후는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태묘(太廟)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단종 원년(1453) 간택되어 이듬해에 왕비에 책봉(冊封)되었다. 단종 3년(1455) 6월 숙부인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함에 따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에 봉해졌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死六臣)들의 단종 복위(復位)운동으로 세조 3년(1457)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에 유배되자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나이 18세로 흥인지문 밖에서 눈물로 이별하고 영월 쪽을 바라볼 수 있는 정업원(淨業院)에 작은 초가를 짓고 3명의 시녀를 데리고 거처하였다.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암자 동쪽에 솟아 있는 동망봉(東望峰)에 올라가서 영월 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머리를 깎은 송씨는 세 시녀와 함께 초가인 정업원(淨業院)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82세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敬
함춘원(含春苑)은 창경궁(昌慶宮) 동쪽에 있는 후원(後苑)이며 성종 15년(1484) 창경궁을 창건하면서 풍수지리설에 의해 궁궐 동편의 지세를 보강하기 위하여 나무를 심고 담을 둘러 출입을 금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었고 성종 24년(1493) 2월 함춘원이란 이름이 정식으로 붙여져 창경궁 후원(後苑)이 되었다. 연조 대에는 함춘원 담장 밖 민가를 철거하여 확장하고, 기묘한 화초를 심어 더욱 심원하고 엄숙하게 하였다. 담 밖에는 별정군(別定軍)을 배치하여 통행을 금하고, 대문과 함께 함춘원 북쪽에 성을 쌓았다. 영조 40년(1764)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이 곳에 옮겨 지었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수은묘를 경모궁(景慕宮)으로 고쳐 불렀는데 정조가 친히 편액(扁額)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日瞻),월근(月覲)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昌慶宮)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9년(1785) 8월 경모궁(景慕宮)과 사도세자의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 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 헌종 5년(1839) 12월 봉안각(奉安閣)이 소실되었으나 곧 중건되었다. 광무 3년(1899) 8월 사도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철종 12년(1861)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22첩으로 구성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의 전국지도이다. 우리 나라를 남북으로 120리 간격으로 구분하여 22층을 만들고,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한면으로 했는데, 축척은 16만분의 1로서 각 층마다 20.1cm 크기의 8폭으로 접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두 면이 한판으로 구성되어 각 층의 판을 병풍식으로 접어 첩으로 만들고 펴면 1장의 지도가 되도록 제작되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지지(地志)에 기초하여 풍부하고 상세한 정보를 수록하였으며 조선 후기 지도 발달의 성과를 종합한 것이다. 지도 첫머리인 1층에는 좌표와 지도표(地圖標), 지도유설(地圖類說), 도성도(都城圖), 경조5부도(京兆五部圖) 등이 실려 있다. 좌표에 방안(方眼)을 그리고, 매방십리(每方十里)라 표시하였으며, 읍과 읍 사이의 도로에 10리마다 눈금을 표시하여 거리의 축척을 알기 쉽도록 하였다. 지도유설(地圖類說)에는 지도 제작의 경위와 지도의 중요성, 지도의 도법, 지도의 실용가치 등에 대하여 서술하고 전국 해안선의 길이와 6대 간선도로의 총길이를 기록하였고대동지지(大東地志)를 별도로 저술하여 지도와 같이 이용할
목멱산(木覓山) 봉수대(烽燧臺)는 경봉수(京烽燧)라고 하며, 조선시대 전국의 봉수(烽燧)를 매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하는 중앙 봉수소였다. 조선 세종 대에 봉수제는 크게 정비되고 발전된 체제를 갖추었으며 조선의 봉수(烽燧)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인 목멱산(남산)의 경봉수(京烽燧), 해륙․변경의 l선에 위치하여 연대라고 호칭된 연변봉수(沿邊烽燧),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되며, 기간 선로상의 직선봉수(直線烽燧)와 그 보조선상의 간선봉수(間線烽燧)으로 구분한다. 봉수(烽燧)는 중앙의 경우는 병조(兵曹)의 무비사(武備司)가, 지방의 경우는 관찰사(觀察使), 수령(守令)과 병사(兵使),수사(水使),도절제사(都節制使),순찰사(巡察使) 등의 군사책임자가 그 임무를 맡았다. 봉수는 동서남북의 어느 변경에 위치한 봉수대(烽燧臺)에서 올린 봉화 (烽火)이든 12시간이면 한성에 도착하였지만 봉수군의 태만,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불거(不擧),불통되거나 전달 소요시간이 지연되는 경우도 많았다. 봉수대에서는 올리는 횃불의 수로 정세의 느리고 급함을 나타냈는데, 평상시에는 1거(炬), 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국경에 나타나
박렬(朴烈)은 1919년 경성고보 재학 중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저명한 아나키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직접 찾아가 교류하면서 그들의 반제 자유의식과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되었다. 아나키즘을 접한 박렬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의혈단(義血團)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 경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만남을 통해 사상 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반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아나키즘단체인 흑도회·흑우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흑도회 기관지인흑도·민중운동(民衆運動)·후토이센징(太い鮮人)·현사회(現社會)등의 잡지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추진하였다. 그해 가을 일본 태자의 결혼식 소식을 전해들은 박렬은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거사에 사용될 폭탄 구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3년 9월 도쿄에
강진원(姜震遠)은 1905년 을사늑약 늑결, 1907년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 군대 강제 해산 등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이 가속화되자 일제의 침탈을 묵과할 수 없다하여 1908년 우국지사인 김명거(金明巨)·김화삼(金化三)·권덕윤(權德允)·김병학(金柄學)·김양화(金良化) 등과 함께 호남의 동부지역인 순천 조계산(曹溪山)을 근거지로 봉기하였다. 의병활동은 지역주민의 호응을 받으며, 1908년 8월 초 곡성 조지촌전투를 시작으로 항일 무장전투를 약 1년여 동안 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남 동부지역인 순천·곡성·여수·고흥·광양·구례와 전북 남원을 무대로 폭넓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화기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순천지역의 조규하(趙奎夏) 의병장과 연합투쟁을 모색하였으며, 나주·곡성의 의병부대를 합류시키는 등 효과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강진원의 항일투쟁은 일제의 침탈기관과 일본 군경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으며 순천 괴목장전투, 과역시장전투, 동복 운월치전투, 쌍암 접치전투와 서정전투, 남원 가정전투, 곡성 압록전투와 동사리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주도하였지만 1909년 6월 순천시 서면 색천사정(索川社亭)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해산되었으며, 강진원은
곽종석(郭鍾錫)은 1896년에 국제법인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거하여 서구 열강들에게 침략세력인 일제를 심판해 줄 것을 요청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文)을 한성 주재 각국 공사관에 발송하며 명성황후 살해, 단발령 등 일제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였다. 고조 광무제로부터 학문적 소양과 능력을 높이 평가받고 더욱 노골화되는 일제의 침략 야욕에 맞서기 위한 다양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늑결되자 을사오적 처단 및 을사늑약 무효와 일제의 침략 만행 폭로 등을 주장하는 상소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동참하여 의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일제에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되자 거창 다전(茶田)에서 은둔자정하며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9년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문제를 해결하고자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국제사회에 대한국의 독립을 요청할 계획을 세웠다. 영남 유림을 이끌고 김복한(金福漢) 등 호서 유림과 함께 학파를 초월한 파리장서(巴里長書)운동을 주도하여 제자들과 함께 국제 사회에 대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유림들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전국의 유림대표 1
박차정(朴次貞)은 1927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여성운동의 전국적인 통일기관인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자 근우회 동래지회 활동을 주도하고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과 출판부문에서 활동하는 등 전국적인 차원에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11.3 대한광복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한성 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0년 봄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는 둘째 오빠 박문호의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국내에서의 항일투쟁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 등 의열단(義烈團)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리고 1931년 의열단 의백 김원봉(金元鳳)과 혼인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였다. 난징(南京)으로 거주지를 옮겨 청년 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임철애 등 가명을 사용하며 여자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김원봉은 1935년 난징에서 좌우 독립운동단체 9개를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자 박차정은 부녀부 주임으로 활동하는 한편, 1936년 이청천 장군의 부인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