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항섭(嚴恒燮)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백범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엄항섭은 불란서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하여 자신이 받은 월급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한편,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유랑생활을 시작하자 김구를 최측근에서 보좌하였다. 임시정부의 활동과 우리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알리는 선전활동에 힘썼으며 1940년 5월 8일에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3당을 통합, 새로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 주석판공실 비서, 1944년 좌우합작 정부에서 선전부장으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미주동포들의 재정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류자명(柳子明)은 1919년 충주 간이농업학교 학생들을 조직하여 대한광복운동을 계획하였으나 비밀이 탄로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고 한성으로 피신하여 청년외교단에 참가하고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신한청년당 비서로 활동하였다. 민족주의자 신채호, 공산주의 이론가 김한 등과 교류하고 당시 유행하던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점차 한인 아나키스트로 변신하였다. 1922년 류자명은 의열단에 아나키즘적인 급진 투쟁이론을 제공하고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작성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고 의열단원 김지섭, 나석주의 의거를 배후에서 지휘하였다. 이후 중국 내 최초 한인 아나키즘 조직인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비롯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조선혁명자연맹, 남화한인청년연맹 등 각종 한인 아나키즘 조직에서 활동하였다. 동시에 1930년대에 여명중학, 입달학교 등지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중국인 아나키스트 및 지식인들과 친분관계를 형성하였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과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며 재중국 한인독립운동세력의 통합운동에 매진하였다. 1942년 좌ㆍ우 독립운동세력을 총망라한 통합의회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된 류자명은 임시약헌 개정 기초위원,
권득수(權得洙)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늑결(勒結)되고, 군대가 강제 해산되는 등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 되자 가산을 정리 하여 군자금을 마련하는 등 국권 침탈에 맞서 구국 헌신을 결의하고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의병 모집에 착수, 격문(檄文)을 돌려 200명이 넘는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양평의 용문산을 근거지로 하여 양주.이천.지평 등지에서 일본 군경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의병부대를 재정비하면서 홍천.춘천.화천 등지까지 활동지역을 넓히고 병력을 보강하였다. 권득수는 민긍호(閔肯鎬),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1907년 8월 조인환(曺仁煥), 신창현(申昌鉉) 등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을 벌이자,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가 250명의 병력을 양평지역에 급파하였고 권득수는 양평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으나 전력의 열세로 패퇴하자 일본군은 의병활동의 근거지인 용문사와 상원사를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07년 9월 2일 일본군 13사단 52연대 9중대와 접전 중 용문사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했다.
조신성(趙信聖)은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진명여학교가 1910년 폐교 위기에 처하자 교장직을 맡아 학생 모집에 매진하는 등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관전현(寬甸縣)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大韓獨立靑年聯合會)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맹산독립단(孟山獨立團)을 조직하여 총참모장으로 활동하며 영원, 덕천, 맹산군 등 서북지방에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7년 2월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고 5월에는 통합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었다. 근우회(槿友會) 평양지회를 설립하고 여성들의 경제의식을 높이고, 여성의 구직을 돕고자 메리야쓰 공장 설립을 추진하는 등 현실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근우회 중앙본부가 해체된 이후에도 평양지역에서 민족교육운동과 여성교육운동에 힘을 쏟았다.
박시창(朴始昌)은 1916년 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갔고 1919년 9월 말 하얼빈을 거쳐 상하이로 갔으며 1921년 10월 부친 박은식(朴殷植),박경산(朴景山), 박태하(朴泰河) 등과 함께 중국인 임택풍(林澤豊)의 지원으로 사민보四民報를 발행하였다. 1925년 11월 1일 오후 8시 부친 박은식(朴殷植)이 상해의원(上海醫院)에서 서거하였다. 1926년경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 5기 포병과(砲兵科)에 입교하였다. 1927년 7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국민혁명군 경위군(警衛軍)에서 근무하였고, 1932년에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나자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의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쓰촨성 중경(重慶)의 신병훈련처로 전임되었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창설하였는데,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시창은 한국광복군 1지대에 편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의 끈진길 항일투쟁과 연합군의 승전으로 일제가 패망하자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의 명령으로 일본군 내 한국 사병을 접
손정도(孫貞道)는 1910년 간도에 파견되어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1912년 105인 사건과 가쓰라(桂太郞) 주살 모의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전남 진도에 2년간 유배되었다. 1919년 4월 이동녕 등 동지 30여명과 함께 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를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하였다.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간사로 이광수·백남칠을 선출한 뒤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선임하였다. 조소앙, 이시영이 초안한 10개조의 헌장과 정강을 심의 통과시킴으로써 4월 11일 임시정부가 내외에 선포되었으며 이동녕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당선되었다. 손정도는 1920년 1월에 김철(金徹)·김립(金立)·윤현진(尹顯振)·김구(金九)와 함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1921년 3월에는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취임하여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하였다. 1922년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회장을 역임하고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노공부장(勞工部長)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7년에는 간도지방 한국
권동진(權東鎭)은 1906년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에서 만난 손병희(孫秉熙)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교, 도사(道師)가 되었으며 전도에도 종사했다.1918년 11월 일본 오사카 매일신보에 소개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 14개 조항을 읽고 보다 구체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2월에 천도교 측의 오세창(吳世昌), 최린(崔麟) 등과 함께 처음으로 대한광복운동을 발의하여 손병희와 상의하였다. 대한광복운동의 대중화, 대한광복운동의 일원화, 대한광복운동의 비폭력화를 결정한 뒤 이를 거족적으로 펴기 위하여 기독교, 불교 등 각종 종교단체를 망라하는 동시에 저명인사들로 민족대표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1일 태화관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천도교 측 15인 중 한사람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천도교에서 발간하던 잡지 개벽(開闢)의 편집진으로, 또한 신간회의 부회장으로 적극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9년 11.3 대한광복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신간회는 엄중한 경계 속에서 반일시위운동과 대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했
김원식(金元植)은 1907년 7월 이후 강원도 북부의 산악지대에서 항일의병을 크게 일으켰고 화천, 양구, 평강, 김화, 금성, 회양, 인제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20여명의 소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는데,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역을 활용하여 주로 야간과 새벽에 기습전을 펼쳐 일제에 타격을 주었다. 또한 충청도 제천에서 일어나 강원 북부의 금강산 지역까지 북상한 이강년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김원식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1908년 6월 6일 금강산 이북의 흡곡현으로 들어가 헌병주재소를 파괴하고 일제의 문서를 소각하였다. 일본어 학교를 불태우고 관리의 의복을 탈취하였다. 친일 한국인 순사 3명을 붙잡아 그중 2명을 총살하는 등 일제의 대한제국 지배를 돕는 친일 관리와 부호도 함께 처단하였다. 전국에 걸쳐 의병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의병탄압작전에 돌입하여 강원도에서는 인제, 금성, 김화, 회양, 통천 등 강원 북부에 주둔하는 수비대로 하여금 의병을 진압하도록 지시하였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 강력히 저항하였으며 1908년 6월 26일 강원도 금
김성숙(金星淑)은 3·1 대한광복운동 때에는 양주·포천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무산자동맹 노동공제회에 참여하여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한성 본회 및 각 지방 지회에 알리는 등 적극적으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으며,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부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중국 베이징에서 광저우 지역으로 옮겨 1928년 한국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을 조직하고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성숙은 1936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고 상임이사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의 편집을 맡았다. 이듬해 조선의용대에 참여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2년 1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으로, 1월 26일에는 3·1절기념주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문태수(文泰洙)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 늑결의 비보를 듣고 구국투쟁에 헌신할 것을 각오하고 항일의 거두인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 구국의 방책을 논의하였다. 1906년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들과 산포수를 규합하여 덕유산 영각사(靈覺寺)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무주 원통사(圓通寺)로 부대를 이동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전에 들어갔다. 무주 안성(安城)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1906년 9월 박춘실이 거느린 부대를 규합함으로써 군세를 크게 확장하였고 9월 하순 장수로 들어가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하여 전멸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이후 전국 각지를 오가며 60여 회에 걸쳐 일본군을 토멸하는 영웅적인 항전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말 의병전쟁이 최고조에 오르자 호남의병대장으로 호남의병 1백여 명을 이끌고 양주로 향하였다. 1908년 1월 말 허위가 거느리는 3백여 명의 별동대가 흥인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공하였지만, 전력의 열세로 패퇴하자 덕유산으로 귀환하여 다시 항일전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1908년 2월 28일 6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헌병주재소를 습격, 적 5명을 사살하는 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