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묵(梁漢黙)은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여 보안회(補安會)를 설립하고 서기로 활동하였다.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해 공진회(共進會)가 설립되자 이에 힘을 보탰다. 1905년 윤효정, 이준과 함께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창립하고, 입헌군주제와 관련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호남의 교육발달을 목표로 1908년 창립된 호남학회(湖南學會) 임시회장 및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초기 천도교의 핵심간부로 교단을 운영하며 교리 정리와 체계화에 힘을 쏟았다.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는 등 동학의 근대화에 기여한 것을 비롯하여,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 등 천도교 교리서를 편찬하며 동학의 교리를 근대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교리강습소에서 천도교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많은 천도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는 3·1 대한광복운동 당시 많은 천도교인들이 앞장서서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는 토대가 되었다. 1919년 2월 20일 권동진으로부터 대한광복운동 계획을 전해듣고 2월 27일 손병희, 이종일, 이종훈과
계봉우(桂奉瑀)는 홍명학교의 교사가 되어 한국사와 지리를 가르쳤고, 1910년 영생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동휘의 가르침에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고 구국운동에 힘썼다. 1911년 초 북간도로 가족과 함께 망명하여 간민회(간민교육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광성학교(光成學校)의 교사로서, 후에는 학감으로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면서 신한독립사ㆍ조선역사ㆍ오수불망(吾讐不忘)을 편찬했다. 1913년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ㆍ이동휘가 주도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와 권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권업신문(勸業新聞)에 만고의사 안중근전(萬古義士 安重根傳)을 연재했다. 하마탕 후하(後河)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다가 1916년 11월 하마탕에서 일제에게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3년 간 고향에서 거주제한을 받게 되었다.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 이후 원산항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철광단에 가입해 단장에 선출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북간도 국민회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상해에 머무는 동안 임시정부 사료수집위원회의 위원과 구국일보(救國日報)의 기자로 활동했으며, 이탁과 함께 임시정
장석천(張錫天)은 광주청년회에서 활동하며 광주시내의 중등학교를 중심으로 비밀결사의 조직과 지원에 힘을 쏟고 있었다. 1926년 11월 초 광주고등보통학교ㆍ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주축으로 신사상의 보급과 연구, 식민지 교육체제 반대 등을 목표로 하는 성진회가 결성되었다.성진회 출신 학생들을 중심으로 각 학교에 연구모임이 지속되었고, 1928년 6월 독서회로 발전하면서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었다.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장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며 독서회 결성을 후원하고 항일의식 고취와 항일운동 방안을 협의했다.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서 전남지역 단일 청년연맹 조직을 위해 노력했다. 며칠 전 나주역에서 발생한 한ㆍ일 학생 간의 충돌로 광주지역 한일학생 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었고 1929년 11월 3일 11.3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났다. 11월 3일 광주고보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귀가 중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이 발생했다. 일제는 한인 주동학생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에 착수했으며 이는 광주지역 사회단체 인사들을 자극하였다. 광주지역 사회단체 지도자들과 대책을 협의하고 대한광복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결의했다. 광주고보생들에게 전단을 작성하고 각
안명근(安明根)은 러일전쟁 직후 대한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때에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을사늑약으로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황해도 지역의 대표적인 교육운동단체였던 안악면학회와 해서교육총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했다. 일제 통감부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켰다. 사촌형 안중근(安重根)은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쳤고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의거를 결행하였다. 1910년 8월 경술늑약 이후 서간도에 한인청년들을 이주시켜 학교를 세우고 교육 후 중국의 무관학교에 보내 독립군 양성, 매국노 이완용ㆍ송병준 처단과 같은 의열투쟁,일본군에 대한 직접적인 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을 구상했다. 신민회에서 해외독립운동기지 개척을 위해 각도의 대표를 선정하고 각도별 모금액을 결정했다. 독립운동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먼저 무기를 구입하고 동지를 규합했다. 박만준ㆍ이승길 등의 동지와 함께 안악ㆍ신천 등의 부호를 찾아 1만원 정도의 자금을 거두었다. 황해
이종희(李鍾熙)는 1919년을 전후하여 중국으로 망명 후 대표적인 의열단체로 일제 식민수탈기구의 파괴와 일본 고위관리나 친일파의 처단을 활동목표로 하는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하여 의열투쟁에 동참하였다. 1925년 북경에서 류자명(柳子明)의 지시로 일제의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한 이후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 전환에 따라 1926년 1월 광주(廣州)로 이동하여 10여 명의 의열단원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4기 보병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남창 주둔 중국군 부대에 배속되어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남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의열단은 혁명간부 겸 항일투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설립하였고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으로 다수의 청년투사를 양성하여 조직의 위상을 재확립하고 항일운동 역량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의열단은 193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대동단결체 결선운동을 주도하여 1935년 7월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박찬익(朴贊翊)은 1904년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히고 신민회의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종교에 입교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11년 2월 간도로 망명하여 경학사ㆍ신흥강습소ㆍ간민교육회 조직 등 간도지역 독립운동기지 개척과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 창설에 참가하여 총무 겸 외무총장으로 활동하였고,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의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업무를 시작하였다. 신규식과 함께 쑨원에게 임시정부의 승인과 원조를 요청하였고, 봉천 군벌과 외교교섭을 벌여 간도지역 한인 동포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힘을 쏟았다.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가흥(嘉興), 항주(杭州) 등지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와 교섭하였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에 기여하였고 10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법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 좌우합작 정부 수립에 공헌하였고, 한중 양 민족의 합작을 목적으로 한중문화협회를 결성하였다.
박자혜(朴慈惠)는 1919년 3ㆍ1 대한광복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 총독부가 총탄을 발포하는 등 평화적인 대한광복운동을 야만적으로 진압하여 각 병원에는 부상자가 끊이지 않았다. 총독부의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민족적 울분을 느낀 박자혜는 함께 근무하던 의사, 간호사들에게 대한광복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며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하였고 간호사들과 동맹파업(同盟罷業)을 준비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나 풀려난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펑티엔(奉天)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여 연경대학(燕京大學)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1920년 4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베이징으로 오자 소개받아 혼인하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1922년 고국으로 돌아와 박자혜 산파라는 산파소를 열고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였다. 한편 중국에 있는 남편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임무를 지원하였다. 1926년에는 한성 지리가 생소한 나석주를 도와 사전에 길을 안내하는 등 나석주의 의거가 성공리에 추진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1928년 4월 신채호가 일경에 붙잡혀 중국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자 남편의 옥바라지까지
양근환(梁槿煥)은 1919년 고향에서 3ㆍ1 대한광복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고 노동과 고학을 병행하였다. 근근히 생활을 꾸려나가면서도 한국인 유학생들의 생활을 보살폈고, 대한국의 광복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할 뜻을 품기도 하였다. 3ㆍ1 대한광복운동 이후 일제가 민족분열통치를 실시하는 가운데, 친일세력 육성에 가장 앞장선 단체가 국민협회였으며 회장 민원식은 한민족이 말과 정신을 모두 버리고 충실한 일본신민이 되어 일본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1921년 2월 16일 민원식을 처단하기로 결심하여 한국인 유학생으로 신분으로 속이고 도쿄역 호텔 14호에서 숙박하고 있는 민원식을 찾아가 그대와 같은 자야말로 민족을 배반하는 자라고 질타하며 가슴에 품었던 비수를 뽑아 처단하였다. 의거 후 호텔을 빠져나와 나가사키항으로 가서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해 배에 올랐으나 뒤쫓아 온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도쿄로 호송되었다. 도쿄지방법원에서 당당한 기세로 일본제국주의의 실상을 폭로하며 대한국의 광복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2년간 옥고를 치렀다.
박재혁(朴載赫)은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재학 중 최천택(崔天澤), 오택(吳澤)과 함께 금지된 대한제국 보통학교의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東國歷史)를 비밀리에 등사하여 배포하였고 부산진 출신 죽마고우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고자 하였다.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왜관에서 무역상으로 근무하면서 자금을 모아 상하이로 건너갔다. 국외에서 항일투쟁의 뜻을 같이 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의열투쟁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19년 11월 간도 길림(吉林)에서 창단된 의열단(義烈團)은 국내 주요 일제 기관들을 폭파시키고자 거사를 추진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이에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은 의열단(義烈團) 탄압에 앞장선 부산경찰서(釜山警察署)에 대한 보복으로 폭탄과 군자금을 건네주며 박재혁에게 거사를 권유하였다.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은 지령에 따라 상하이에서 부산에 잠입,고서(古書)를 파는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향하여 숨겨 놓았던 폭탄(爆彈)을 투척(投擲)하여 폭살시켰다.
윤기섭(尹琦燮)은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부임하였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와 신민회의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8월 서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하는 등 간도를 무장독립운동기지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10여년간 신흥무관학교에서 학감, 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대한광복운동을 주도할 많은 군사인재를 양성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임시의정원에서 일제와 전쟁을 벌일 것을 직접 주장하였다.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창설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각국의 대표들에게 독립요구서를 발송하는 등 외교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하이에 설립된 한인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우리말과 우리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대한광복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헌신하였다. 1935년부터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서 활동한 선생은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대한광복운동세력이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결집하면서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