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23일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勒結)하고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1897-1919)의 국방 및 재정의 실권 장악, 그리고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을 통한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노골화했고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8월 영일동맹(英日同盟)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9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대한제국의 독점지배에 대한 승인을 얻어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에게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했다. 일제(日帝)는 을사늑약의 늑결을 위해 고조(高祖) 광무제에게 협박을 거듭했으나 불응하였고 1905년 11월 17일 고조 광무제가 불참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이토 통감은 을사5적(乙巳五賊)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 늑결(勒結)하였고 1906년 설치된 일제(日帝) 통감부(統監府)는 대한 황실 궁내부(宮內府)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를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하고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여 현재 교육기관,문화기관과 외국에서 소장중이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황실 미술공예품은 1909년 11월 1일 순종 융희제가 창경궁(
이경직(李耕稙)은 189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12월 전라도 삼례역(參禮驛)에 모인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하자 동학은 이단이므로 계속 금압할 것이며, 교도들에 대한 지방 관리의 침학을 금단하겠다고 약속하여 동학교도들을 해산시켰다. 이듬해 동학교도 40여 명이 과거 응시를 가장하여 한성으로 올라가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고조 광무제에게 직접 교조 신원(伸寃)을 요구하였고 동학교도들의 상경을 막지 못하여 파면되었다. 이경직은 1895년 궁내부대신이 되었으며 8월 20일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의 사주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군과 낭인을 동원, 경복궁으로 난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때 침전인 건청궁 옥호루(玉壺樓)에서 난입하는 일본군과 낭인들을 막다가 총탄을 맞고, 고조 광무제가 보는 앞에서 일본군의 칼에 찔려 죽었다. 1897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직계, 1899년에는 의정부(議政府) 의정(議政)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1900년 장충단(奬忠壇)에 제향(祭享)되었다.
최제우(崔濟愚)는 1859년 경주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했다. 1860년 4월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했다.1861년 포교를 시작하여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정부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으므로 1862년 3월까지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해 있었다. 은적암(隱寂庵)에서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論學文)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제자 중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전도에 힘쓰게 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1862년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접은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으며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
이진호(李軫鎬)는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득세하자 유길준, 우범선, 이두황 등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관련있는 인물들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했다.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한 뒤 돌아와서 중추원 부찬의, 평안남도 관찰에 임명되었다. 관서 지방에 민족 의식을 고양하는 사립 학교가 많이 세워지는 분위기를 견제하고자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을 때는 교장을 역임했다.1910년 경상북도 장관, 1916년 전라북도 장관,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전라북도 지사에 임명되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났을 때 총독부가 친일 관료와 지방의 지주들을 규합하여 자제단을 구성하자 전라북도에 전북자제단을 조직해 대한광복운동의 확산을 막았다.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촉탁(1921), 조선중앙위생회 위원(1921), 조선구락부 발기인(1921)를 거쳐 1924년에는 총독부 학무부 국장에 임명되었다. 1934년에는 중추원 참의, 1941년에는 부의장, 1943년에는 고문이 되었고, 귀족원 의원에까지 올랐으며 태평양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친일 단체에도 적극 참여했다.
신립(申砬)은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도총부도사·경력·진주판관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가 쳐들어왔다. 니탕개는 선조 초년부터 6진(六鎭)에 자주 드나들며 공순(恭順)의 뜻을 보였으므로 정부에서 관록(官祿)을 주고 후대했으나,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경원부로 침입, 아산보(阿山堡)와 안원보(安原堡)를 점령했다. 이에 기병 500여 명을 동원하여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1만여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 공으로 1584년 함경도북병사에 오르고 환도(環刀)와 수은갑두구(水銀甲頭口) 등을 받았다. 1587년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침입한 왜구 격퇴를 위해 우방어사로서 좌방어사 변협(邊協)과 함께 출진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여 적병 2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1590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金汝岉)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