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덕엽 칼럼니스트 ] 대한민국이 스스로 자랑해온 ‘디지털 정부’의 민낯이 드러났다.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정부24, 모바일 신분증, 국민신문고, 인터넷우체국 등 국민 생활과 직결된 70여 개의 서비스가 순식간에 마비됐다. 단 한 번의 불꽃이 국가 핵심 행정을 동시에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번 사고는 단순한 화재 사건이 아니다. 647개 업무시스템이 멈춰 선 사실은, 대한민국의 전자 행정이 얼마나 취약한 구조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서버와 UPS 배터리를 같은 공간에 배치한 기본적 안전 불감증, 위험을 알면서도 이설 작업을 늦춘 무책임, 이중화·재해복구 체계를 갖추고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한 무능. 이는 예측 불가능한 재난이 아니라, 철저히 예고된 인재(人災)였다.
더욱 심각한 점은 이번 사태가 ‘반복된 경고’라는 사실이다. 불과 2년 전에도 행정 전산망이 멈춰 전국적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재발했다. 이는 관리 부처가 교훈을 외면했음을 의미한다. “재난은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안일한 태도가 낳은 결과이며, 이는 국민을 두 번 배신한 것이다. 정부는 현재 ‘순차 복구’와 ‘불편 최소화’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이 듣고 싶은 대답은 그것이 아니다. 국민은 묻고 있다.
왜 대한민국의 국가 전산망이 단일 실패 지점(single point of failure)에 방치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정부’라는 홍보와 달리, 현실은 불씨 하나에 무너지는 허술한 구조였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화재는 단순히 불을 끄고 시스템을 복구하는 수준으로 마무리해서는 안 된다. 구조적 대책 없는 임시 봉합은 제2, 제3의 대란을 불러올 뿐이다.
책임자 문책을 비롯해, 국가 전산망 관리 체계의 전면 개편이 필요하다. 클라우드 기반 이중화, 재난 대응 매뉴얼의 실질적 운영, 독립적 감사 시스템 마련 없이는 대한민국의 디지털 행정은 또 다시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국민의 신뢰를 지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책임이다. 이제는 정부가 스스로 내세운 ‘디지털 선진국’이라는 허울을 내려놓고, 국민 앞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 사태의 진정한 교훈은 단 하나다. 배터리 하나의 불꽃으로 무너진 대한민국의 디지털 국가, 다시 세우지 않으면 국민은 더 이상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