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덕엽 칼럼니스트 ] 재난은 시스템을 멈추고, 정치는 사고를 키운다. 정부 전산망이 대규모로 멈춰 선 날, 국민은 창구로 몰려가 서류 한 장을 받기 위해 반나절을 허비했고, 사업 일정과 생계는 줄줄이 뒤로 밀렸다.
그러나 정치는 달랐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복구를 서두르고 대책을 약속하기보다, 책임의 화살을 서로에게 돌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기계는 식었고 서버는 재가동을 기다리는데, 유독 정치만은 뜨거운 말 폭탄으로 과열됐다.
정치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원인 규명을 의회의 책무로 명확히 하고, 국민 피해를 즉각 줄이는 조치를 법과 예산으로 뒷받침하며, 재발 방지 구조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회는 누구 책임이 더 큰지 공방을 벌이며 과거 정권과 현 정권을 오가고, 청문회와 국정조사라는 익숙한 의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시스템의 마비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책임의 마비다.
전산망 이중화와 재해 복구 체계의 허점, 발주와 유지보수의 관성, 감사와 점검의 형식화는 정권이 한두 번 바뀌었다고 새로 생긴 문제가 아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문서의 허풍은 살아남았고, 매뉴얼은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 사이 국민은 민원 하나를 위해 반차를 내고, 영업을 멈추고, 대체 수단을 찾아 헤매야 했다. 이 현실 앞에서 “네가 더 잘못했다”는 정치는 국민을 모욕하는 일이다.
여야는 당장 행동으로 증명해야 한다. 기술과 사실을 중심에 놓는 초당적 감사 구조를 꾸리고, 전원·배터리·항온항습·화재 대응·망 이중화·재해 복구 전 과정을 실명과 데이터로 검증해 결과를 공개해야 한다. 모호한 설명과 홍보성 브리핑 대신,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장애 범위, 영향 서비스, 예상 복구 단계, 대체 경로를 정시 브리핑으로 고정해야 한다. “최대한 신속히”라는 상투적 표현은 면죄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법정 복구시간과 복구목표를 숫자로 못 박고, 이를 위반했을 때 기관과 책임자에게 실질적 제재가 따르도록 해야 한다. 복구가 길어질수록 책임 공방은 커진다. 그래서 복구가 끝난 뒤 책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 확인을 복구와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자료 제출을 미루는 관료주의, 핵심 수치를 감추는 관행을 이번만큼은 끊어야 한다.
여당에게 묻는다. 국가 디지털 대전환을 외칠 자격이 있으려면 단일 실패 지점을 제거하는 데 예산과 인력을 먼저 배치했어야 한다. 행정 홍보 예산보다 백업 센터, 콜드사이트, 가스계 소화, 전원 이중화에 더 투자했는가. 야당에게도 묻는다. 정권 비판은 야당의 의무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설계도 없이 증언 채택과 청문회만 외친다면, 정치의 결과물은 카메라에 잡힌 분노뿐이다. 시스템은 분노로 복구되지 않는다.
정치의 언어가 가벼울수록 기술의 언어는 무거워져야 한다. 국민 불편 최소화라는 추상 대신, 대체 경로를 법으로 확정하고, 서면 발급과 기한 연장, 소급 인정 같은 실제 조치를 명문화해야 한다.
특히 취약계층과 영세 자영업자, 장애인과 고령층을 위한 현장 대행 창구를 상시 가동하고, 모바일이 없는 시민에게 오프라인 예외를 제도화해야 한다. 재난 때마다 현장이 임시로 알아서 대처하는 관행은 국가의 직무유기다. 국회는 말로 승부하지 말고 시간으로 승부해야 한다. 관련 법안 발의와 심사, 의결을 신속처리 트랙으로 묶고, 예산과 인력 이동을 즉시 집행해야 한다. 재난 대응은 정기국회 일정이 아니라 국민의 생활 일정을 우선한다.
우리는 지금 재난을 정권 심판의 소재로 소비할 것인지, 국가 표준의 새 기준을 세울 계기로 만들 것인지의 기로에 서 있다. 정치는 재난을 심판의 도구로 쓰려 하지만, 국민은 재난을 개선의 계기로 바꾸길 원한다. 이 간극을 줄이는 것이 정치의 존재 이유다.
정치가 시스템을 고치지 못하면, 시스템이 정치를 심판한다. 국민은 더 이상 네 탓 공방에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복구를 가속하는 입법과 책임을 확정하는 조사, 그리고 다음 재난을 막는 표준이다. 그 세 가지를 하지 못한다면, 이번 사태의 진짜 이름은 정치의 실패가 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더타임즈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