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타임스 이종납 편집장] 박근혜 전 대표가 “한국 정치가 위기다”라고 작금의 상황을 한마디로 언급했듯 세상이 놀랍게 바뀌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침묵의 나선형 이론’처럼 소수로 전락하고 있는 ‘보수’들이 이제는 ‘보수를 보수’라 하지 못하고 ‘보수의 끼’마저 감추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제는 국민들도 ‘보수’라고 하면 ‘수구’로 인식되기 때문에 ‘진보를 추구하는 보수’나 ‘개혁적 보수’라는 말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예전과 같이 ‘현 지도부사퇴’나 ‘임기응변식 정책발표’같은 조삼모사식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현 상황을 뒤바꿀 수 없는 최악의 위기에 내몰려 있다. 보수진영 조차도 급변해가는 정치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특정리더의 개인적인 주장이나 입장차이로 인해 갈갈이 찢어진 상태로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보수진영과 한나라당이 살 길이자 난마와 같이 얽혀있는 정국을 수습할 마지막 카드는 박근혜 전 대표를 정치전면에 내세우는 일뿐이다. 범보수진영이 부르짖고 있듯이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이 박 전 대표뿐이라면 ‘보수대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명분과 권한과 책임 등 모든 전
[더타임스 지만호 칼럼니스트] 지난 10월 26일 치른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거대 집권 한나라당 대 시민운동가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야권전체와의 한판싸움이었다. 삼심제로 보아서 시민운동가가 3대2로 이긴 싸움이다. 온 몸을 후벼 파는 독살을 무기로 싸우는 두 후보를 보는 객중의 구경 꾼 들 속엔 온 몸이 쓰리도록 함께 아픈 사람도 있는가 하면 서글픈 감정으로 돌아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어느 한쪽이 정책선거에서 하프게임으로 승패가 끝났다면 기절 한번하고 일어섰겠지만 네거티브공격으로 서로에게 주고받은 아픔의 고통이야 말로 치유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러한 사연은 우리의 선거 고질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역 갈등 조작에서 부터 용공색깔론으로 단골메뉴의 약발이 떨어지고 나니 이제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조작하는 네거티브선거가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기에 말이다. 가장 서비스 적이고 유권자 편에 서는 정책 대결이 있음에도 별무 메뉴로 뒤 처져 있는 게 아쉬운 문제였다고 지적하지만, 그러나 정책 대결은 자칫 하면 부도 성 공약으로 흐지부지 폐기될 수가 있는 게 단점이다. 준비된 자료와 철저한 계산으로 공부하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상태에서
10월26일 날 치른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거대 집권한나라당 대 시민운동가와 이를 지원하기 위한 야권전체와의 한판싸움이었다. 삼심제로 보아서 시민운동가가 3대2로 이긴 싸움이다. 온 몸을 후벼 파는 독살을 무기로 싸우는 두 후보를 보는 객중의 구경 꾼 들 속엔 온 몸이 쓰리도록 함께 아픈 사람도 있는가 하면 서글픈 감정으로 돌아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어느 한쪽이 정책선거에서 하프게임으로 승패가 끝났다면 기절한번하고 일어섰겠지만 네거티브공격으로 서로에게 주고받은 아픔의 고통이야 말로 치유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러한 사연은 우리의 선거 고질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역 갈등 조작에서 부터 용공색깔론으로 단골메뉴의 약발이 떨어지고 나니 이제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조작하는 네거티브선거가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기에 말이다.가장 서비스 적이고 유권자 편에 서는 정책 대결이 있음에도 별무 메뉴로 뒤 처져 있는 게 아쉬운 문제였다고 지적하지만, 그러나 정책 대결은 자칫 하면 부도 성 공약으로 흐지부지 폐기될 수가 있는 게 단점이다. 준비된 자료와 철저한 계산으로 공부하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상태에서 내 놓은 정책이야 말로 틀림없이 부도가
이유필(李裕弼)은 1900년대 초 안창호·전덕기·양기탁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12년 일본 정부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할 목적으로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져 1년간 진도에 유배되었다.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발생하자 평안북도 의주 등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상하이로 망명했다.1919년 임시의정원 창설에 참여하였고 4월 상해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국장을 역임했으며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을 주도했다. 1920년 안창호와 임시정부 선전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그해 8월에는 미국 상하원의 의원단을 찾아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1년 4월 한·중 양국이 대일항쟁에 공동 대처하자는 취지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 설립에 참가했다.1922년 김구, 손정도와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경리부장이 되었으며 1926년 김구가 노병회 이사장직에서 사퇴하자 후임 이사장에 취임했다. 1923년 8월 한인거류민단 민단장에 선출되어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장도 겸임하였고 잡지 민성(民聲) 등을 창간, 발행하였다. 1924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이 되었으며, 1
어느날 정치권에 혜성처럼 나타나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안철수라는 이름으로 융단 폭격함으로써 정당정치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어 놓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민운동가 출신의 박원순 무소속 후보를 서울시장으로 탄생 시키는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 안철수 교수다.이로인해 기존의 제 정파 및 정치세력들은 마치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공항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인가. 흔히들 말하는 ‘안철수 현상’은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한마디로 여야를 막론하고 ‘기존의 정당과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실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시대가 변화고 국민들의 정치의식도 급변하게 변해 가는데 정치권은 말로만 변화와 개혁을 외칠 뿐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들은 투표반란을 통해 새로운 세력을 대안세력으로 세력교체 함으로써 정치권을 응징하는 것이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보면 기존의 정치권이 네거티브로 대리 난타전을 벌이고 있을때 안철수 교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출전을 양보하고 대신 출전시킨 박원순 후보를 돕기 위하여 투표를 이틀 앞두고 박원순 후보 선거 캠프를 방문하여 서신을 전달 한 것이 전
말 많던 10.26선거도 마침내 끝났다.승리한 측에게는 그동안 쌓아온 노력으로 유권자들이 결실의 열매를 주었고, 패배한 측에게는 그동안 귀 막고 국민 무시하고 오만방자하게 굴던 정치행태에서 벗어나 처절한 자기반성과 석고대죄 할 계기를 만들어줬다. 이때마저 놓친다면 여당에게는 이제 희망이 없다.특히 서울시장 선거는 내년 총선과 대선을 예측할 수 있는 바로미터란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를 잘 분석하고 대비해야 내년 총선과 대선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여당은 나경원 후보가 나서 초반 야 통합후보인 박원순 후보에게 두 자리 수 이상 크게 벌어졌던 지지율 차이를 검증이란 이름으로 병역문제, 학력문제, 이념문제는 물론 사생활 의혹들을 들이대면서 차이를 좁히고 오히려 넘어섰다며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는 곧 자신에게 되돌아 치는 부메랑에 불과했다. 유권자이자 관전자인 네티즌들은 편파적이고 왜곡적인 일부 언론과 방송을 비웃고 조롱하며 자신들끼리 열심히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소통했다. 지식인과 젊은층이 자각하는 순간이요, 내곡동 땅 구입 문제를 기획부동산 행태라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정권심판에 두 눈과 가슴이 이글거렸다.대부분의 네티즌 유권자들은 나
나라가 온통 보궐선거로 열기가 뜨겁다.특히 서울시장을 뽑는 보궐선거는 막판을 향해 가면서 비난과 고소, 고발 전으로까지 발전, 여야가 자칫 원수가 된 것 같은 분위기다. 선거란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정보와 판단으로 도덕적이고 유능한 인물들이 나와 축제 분위기가 되어야하는데, 한쪽에서는 아직도 철 지난 이념으로 걸고넘어지고, 이에 질세라 상대 쪽에서는 학원문제로부터 이와 관련된 청탁의혹과 고액 클리닉 고객 아니냐는 의혹 등 서로 난타전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시끄럽고 의욕 없는 서민들에게는 정말 눈살을 더욱 찌푸리게 하는 불쾌지수 제조기들이다.추수의 계절이요, 가을걷이를 저장해 둬야하는 추수동장(秋收冬藏)의 시기에 한국 정치가 너무 혼란스럽다.이처럼 선거가 혼란스러운 것은 오세훈 전 시장이 무모하게도 무상급식을 투표에 붙임으로써 벌어진 일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이에 여당에서는 처음 홍준표 당대표도 반대하던 나경원 의원이 후보로 나와 고군분투 중이고, 박근혜 전 대표도 적극 유세로 돕고 있다.야당은 무소속의 박원순 통합 후보가 또한 막바지 피치를 올려가고 있다. 아울러 뉴스에 의하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안철수 교수가 종반에 이른 시
윤웅렬(尹雄烈)은 1878년 통리기문아문 참사를 지내고,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1년 5군영(五軍營)에서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조선 최초의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만들고, 좌부영관(左副領官)으로서 별기군을 주도했다.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민들이 친일 인물들의 집을 파괴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자 한성을 탈출하여 원산을 거쳐 부산으로 가서, 박제경(朴齊絅)의 주선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망명했다. 임오군란이 실패한 후 귀국하여, 개화당 인물들과 가깝게 지냈으나 조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행동에 반대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내각의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진행되는 동안 아들 윤치호에게 외세에 의지한 것이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으며, 소수의 일본군으로 다수의 청나라 군대에 대항할 수가 없다는 등 6가지 이유를 들어 실패를 예견했다. 청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이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물들을 귀국시키고 흥선헌의대원왕을 끌어들여 친일 정권을 수립하자 풀
이범진(李範晉)은 1887년 협판내무부사가 되었으며 일본의 침투에 맞서 미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명성황후가 친러정책을 표방하게 되자 농상공부 대신이 되었다. 1895년 7월 궁내부대신 서리가 되었으나 8월 20일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파면되었다. 그해 10월 친일정권에 포위되어 있던 고조 광무제를 궁궐 밖으로 피신시키고 친일정권을 타도하여 새 정권을 세우려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러시아 공사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듬해 비밀리에 귀국,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함께 2월 11일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등의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내각이 들어서자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이범진은 1897년 주미공사가 되고, 1900년 주러공사로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했다.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늑결된 뒤 일제가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고 고조 광무제의 특사 명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국권 회복에 힘썼다. 1907년 6월 고조 광무제의 특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만나 회의에 보내는 장서(長
이위종(李瑋鍾)은 외국공관장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을 순회하여 외국어에 능통했다. 아버지가 주 러시아 공사가 되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 주재 한국공사관이 폐쇄되었으나 아버지 이범진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면서 외교활동을 했다.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조 광무제는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3명의 특사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정사 이상설(李相卨)과 부사 이준(李儁)이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장서(長書)를 번역했다.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펴보았으나 희망이 없자 6월 19일 그곳을 출발, 독일의 베를린에서 장서를 인쇄하고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서 장서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를 프랑스어로 만들어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국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고, 각국의 대표위원들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그러나 이러한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특히 영국인 스테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