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계훈(洪啓薰)은 무예청 별감으로 관직을 시작하였으며 1882년 8월에 일어난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업고 피신시킨 공으로 출세하였다. 1894년 장위영 영관(領官)을 지냈다. 그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출전하여 전주를 탈환하고 그 공으로 훈련대장이 되었다.1895년 미우라 주한 일본공사의 명성황후 살해사건 때 경복궁 광화문 안에서 일본군의 침입을 저지하다가 총을 맞고 죽었다. 홍계훈은 미우라 공사의 명성황후 살해사건 때 명성황후를 지키다가 죽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더불어 1900년 장충단에 제향되었다.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홍계훈이 미우라 일본 공사의 명성황후 살해사건 때 일본군의 총을 맞고 쓰러진 뒤 며칠 뒤에 죽었으며 인품이 염결(廉潔)하고 근신(勤愼)했다고 하였고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들에서 일본군 장교의 칼에 찔린 뒤 8발의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썼다.
신뢰사회가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다.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지난 14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 소재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에서 열린 93회 탄신제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얘기하면서 여기서 만족하지 말고, “국민의 행복과 삶의 질이 어느 나라보다 높고, 집안 사정이 어떻든 정직하고 성실히 노력한다면 누구나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이는 박 전 대표가 누누이 강조한 ‘신뢰사회’의 연장선에서 누구든 열심히 일하면, 다른 외적 요소가 아닌 정직하고 올바른 사회구조에 의해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성공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당연한 이야기다.지금처럼 가문의 뒤 배경으로 남들 다 가는 군대 빼먹거나 심지어 행방불명까지 의지를 가지고 해 가면서 고시에 합격한 후 고령이란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는 자가 출세를 해서는 안 된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건장한 젊은이가 4대 의무 중 하나인 병역을 면탈하고 편법, 불법, 위법, 탈법을 통해 부를 축척한 후 선출직 국회의원이나 그 이상의 직책에 출마하여 당선됨은 참으로 있어서는 안 될 불신사회요, 후진국가라 할 것이다.이에 앞으로
이경직(李耕稙)은 1892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12월 전라도 삼례역(參禮驛)에 모인 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하자 동학은 이단이므로 계속 금압할 것이며, 교도들에 대한 지방 관리의 침학을 금단하겠다고 약속하여 동학교도들을 해산시켰다. 이듬해 동학교도 40여 명이 과거 응시를 가장하여 한성으로 올라가 경복궁 광화문 앞에 엎드려 고조 광무제에게 직접 교조 신원(伸寃)을 요구하였고 동학교도들의 상경을 막지 못하여 파면되었다. 이경직은 1895년 궁내부대신이 되었으며 8월 20일 이토 히로부미 일본 총리의 사주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일본군과 낭인을 동원, 경복궁으로 난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할 때 침전인 건청궁 옥호루(玉壺樓)에서 난입하는 일본군과 낭인들을 막다가 총탄을 맞고, 고조 광무제가 보는 앞에서 일본군의 칼에 찔려 죽었다. 1897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직계, 1899년에는 의정부(議政府) 의정(議政)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1900년 장충단(奬忠壇)에 제향(祭享)되었다.
최제우(崔濟愚)는 1859년 경주 구미산(龜尾山)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련했다. 1860년 4월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종교체험을 했다. 이후 1년 동안 깨달은 것을 정리하고 체계화했다.1861년 포교를 시작하여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정부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으므로 1862년 3월까지 남원의 은적암(隱寂庵)에 피신해 있었다. 은적암(隱寂庵)에서 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려고 노력해 논학문(論學文)을 써서 서학을 비판하고, 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제자 중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 전도에 힘쓰게 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1862년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로 하여금 관내의 신도를 관할하게 하여 신도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접은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설치되었으며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그해 7월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北接主人)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2대 교주로 삼았다. 그해
이진호(李軫鎬)는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득세하자 유길준, 우범선, 이두황 등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관련있는 인물들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했다.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한 뒤 돌아와서 중추원 부찬의, 평안남도 관찰에 임명되었다. 관서 지방에 민족 의식을 고양하는 사립 학교가 많이 세워지는 분위기를 견제하고자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을 때는 교장을 역임했다.1910년 경상북도 장관, 1916년 전라북도 장관,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전라북도 지사에 임명되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났을 때 총독부가 친일 관료와 지방의 지주들을 규합하여 자제단을 구성하자 전라북도에 전북자제단을 조직해 대한광복운동의 확산을 막았다.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촉탁(1921), 조선중앙위생회 위원(1921), 조선구락부 발기인(1921)를 거쳐 1924년에는 총독부 학무부 국장에 임명되었다. 1934년에는 중추원 참의, 1941년에는 부의장, 1943년에는 고문이 되었고, 귀족원 의원에까지 올랐으며 태평양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친일 단체에도 적극 참여했다.
신립(申砬)은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도총부도사·경력·진주판관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가 쳐들어왔다. 니탕개는 선조 초년부터 6진(六鎭)에 자주 드나들며 공순(恭順)의 뜻을 보였으므로 정부에서 관록(官祿)을 주고 후대했으나,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경원부로 침입, 아산보(阿山堡)와 안원보(安原堡)를 점령했다. 이에 기병 500여 명을 동원하여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1만여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 공으로 1584년 함경도북병사에 오르고 환도(環刀)와 수은갑두구(水銀甲頭口) 등을 받았다. 1587년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침입한 왜구 격퇴를 위해 우방어사로서 좌방어사 변협(邊協)과 함께 출진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여진족 부락을 공격하여 적병 2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1590년에는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받고 김여물(金汝岉)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
정여립(鄭汝立)은 1570년(선조 2)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에 올랐다. 서인으로 이이와 성혼(成渾)의 후원을 받았으나, 이이가 죽은 뒤 집권세력인 동인 편에 서서 이이·성혼·박순(朴淳)을 비판하여 서인의 집중적인 비판의 표적이 되고 선조의 눈밖에 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근의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했으며 보름마다 1번씩 무술훈련을 하는 등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다. 1587년에는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원을 이끌고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뒤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海州)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 등과 왕래하면서 대동계(大同契)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1589년 한강이 언 틈을 타서 입경, 대장 신립(申砬) 등을 죽이고 병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의 고변(告變)으로 관련자들
한백겸(韓百謙)은 1586년(선조 19) 천거로 관직에 올라 중부참봉(中部參奉)·경기전(慶基殿) 참봉·호조좌랑·형조좌랑을을 지내다가 외직인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발령받아 2년간 근무하다가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강원도 영월군수에 부임했다.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 때 연좌되어 귀양갔다. 임진왜란 때 석방되어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하여 난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으로 내자직장(內資直長)이 되었다. 1602년 청주목사를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다.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와 호조 참의를 지냈다.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였을 때 대신들은 한백겸이 예(禮)에 밝다 하여 빈전(殯殿)의 모든 상례(尙禮)를 맡겼다.1612년 파주목사에 발령되었으나 벼슬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한다. 1615년 명저인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저술하였다.
허준(許浚)은 1569년 6월 부제학 류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였다.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과 류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서 출사했으며, 1570년 류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한성에서 고관대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명성을 높였다. 종4품 내의원 첨정에 오른 이후 뛰어난 의술로 조선 왕실의 병을 고쳐 내의(內醫)로서의 명성을 높였다.1573년 정3품 통훈대부 내의원정에 올랐다. 1575년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 어의(御醫)로 임명되었다.1578년 9월 허준은 내의원 첨정으로 있을 때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선물로 하사받았다. 1587년 심신이 허약해진 선조의 건강이 회복되어 수고로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다.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김씨의 남동생을 진료하여 완쾌시켰고, 1590년 허준이 왕자 신성군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건강을 돌본 공로로 허준은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6년 광조의 병을 맡게되어 이를 고친 공로로 허준은 정2품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문하에서 일생 동안 사사하면서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 주류의 계통화는 조선 역사의 체계적 파악 가능성을 높였다.동사강목 (東史綱目)등을 저술하여 과거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내세웠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시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경고하였다. 이익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을 수정 가필하고 요령있게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이라는 대작을 편찬하였다.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 진력하였다. 영조 25년(1749)에 만령전(萬寧殿) 참봉(參奉)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감찰·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그의 학문은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어울려서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인 정립을 모색하여 갔다. 이러한 사상적 성과는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30권 15책을 비롯한 많은 저술로서 집대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