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겸(韓百謙)은 1586년(선조 19) 천거로 관직에 올라 중부참봉(中部參奉)·경기전(慶基殿) 참봉·호조좌랑·형조좌랑을을 지내다가 외직인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발령받아 2년간 근무하다가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강원도 영월군수에 부임했다.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 때 연좌되어 귀양갔다. 임진왜란 때 석방되어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하여 난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으로 내자직장(內資直長)이 되었다. 1602년 청주목사를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다.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와 호조 참의를 지냈다.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였을 때 대신들은 한백겸이 예(禮)에 밝다 하여 빈전(殯殿)의 모든 상례(尙禮)를 맡겼다.1612년 파주목사에 발령되었으나 벼슬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한다. 1615년 명저인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저술하였다.
허준(許浚)은 1569년 6월 부제학 류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였다.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과 류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의관으로서 출사했으며, 1570년 류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한성에서 고관대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명성을 높였다. 종4품 내의원 첨정에 오른 이후 뛰어난 의술로 조선 왕실의 병을 고쳐 내의(內醫)로서의 명성을 높였다.1573년 정3품 통훈대부 내의원정에 올랐다. 1575년 선조의 중병을 고쳐 신망을 얻게 되어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 어의(御醫)로 임명되었다.1578년 9월 허준은 내의원 첨정으로 있을 때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선물로 하사받았다. 1587년 심신이 허약해진 선조의 건강이 회복되어 수고로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다.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김씨의 남동생을 진료하여 완쾌시켰고, 1590년 허준이 왕자 신성군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건강을 돌본 공로로 허준은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6년 광조의 병을 맡게되어 이를 고친 공로로 허준은 정2품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문하에서 일생 동안 사사하면서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 주류의 계통화는 조선 역사의 체계적 파악 가능성을 높였다.동사강목 (東史綱目)등을 저술하여 과거의 역사와 지리학을 비판하고,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내세웠다. 또한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여 당시 학자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경고하였다. 이익의 대표적 저서인 성호사설을 수정 가필하고 요령있게 정선한 성호사설유선이라는 대작을 편찬하였다.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 진력하였다. 영조 25년(1749)에 만령전(萬寧殿) 참봉(參奉)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감찰·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그의 학문은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들과 어울려서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인 정립을 모색하여 갔다. 이러한 사상적 성과는 순암선생문집(順庵先生文集) 30권 15책을 비롯한 많은 저술로서 집대성되었다.
이익(李瀷)은 1705년(숙종 31년) 증광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의 형 이잠(李潛)이 당쟁으로 희생된 후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몰두하여, 류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으며, 특히 천문·지리·의약·율산(律算)·경사(經史)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1727년(영조 3년)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으로 임명했으나 사양하고 저술에 힘쓰는 한편 서학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천문략(天文略), 천주실의(天主實義), 주제군징(主劑軍徵), 칠극(七克), 진도자증(眞道自證) 등을 연구하였다.그는 평생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광주 첨성리(瞻星里)에 머물러 학문을 연마하였으나 항상 국가 부흥을 위한 자기의 이상과 포부를 저술하여 불교와 세유(世儒)의 실용적이지 못한 학풍을 배격하고 실증적(實證的)인 사상을 확립시켰다. 역사 서술의 태도에서도 종래의 방법을 버리고 비판적·고증적(考證的)인 파악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당쟁의 폐단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투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양반이 실제적인 산업에 종사하지 않고 관직을 얻음으로써 재산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한정된 직제(職制)에 비해 너무 많은 수의 관리가 배출되므로 자연히 당파
류형원(柳馨遠)은 1654년 진사시에 급제했지만, 당시 과거제의 폐단이 극심한 것을 보고 이후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뒤 고금의 전적 1만여 권을 보면서 현실사회를 구제하기 위한 학문연구와 저술에 몰두했다.그는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악습을 제거하고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원하는 실학적인 목적을 추구했다. 따라서 종래에 소홀히 되었던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어학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정치·경제 문제의 연구에 힘썼으며, 국방을 위해 군사학도 연구했다. 류형원의 주저(主著)로서 26권 13책으로 되어 있는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전면적 개혁에 의한 국가재조책을 제시한 저술로, 전제(田制:토지제도, 재정·상공업 관계) 4권, 교선지제(敎選之制:향약·교육·고시 관계) 2권, 임관지제(任官之制:관료제도의 운용 관계) 1권, 직관지제(職官之制:정부기구 관계) 2권, 녹제(祿制:관리들의 보수 관계) 1권, 병제(兵制:군사제도의 운용, 축성·병기·교통·통신 관계) 2권과 각권의 고설(攷說)을 비롯해 속편(의례, 언어, 노예, 적전[籍田] 기타)과 보유(補遺:군현제)로 구성되어 있다.
채제공(蔡濟恭)은 1743년(영조 19년) 문과 정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수찬(修撰) ·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747년(영조 23년) 익릉별검을 거쳐, 1748년(영조 24년)에는 승문원에 들어갔다. 같은해 가주서로 한림회권에는 참가할 수 없었으나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이권(二圈)을 더하여 소시(召試)에 응하도록 하여 뽑히도록 하는 등 특은(特恩)을 입었으며 이것으로 쳥요직인 예문관검열이 될 수 있었다. 1753년(영조 29년) 호서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균역법의 시행을 조사하고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이후 홍문관수찬,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사헌부집의를 거쳤고 특히 세자(世子)의 학문정진에 대한 많은 건의를 하였다. 1755년(영조 31년)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으로 활약하였고, 그 공로로 승정원 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와 대사간을 역임하고, 열성지장(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영조 34년)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해에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세자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목숨을 걸고 이를 극력 막아 철회
김정희(金正喜)는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실사구시설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했고 북한산비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김정희는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1819년
이서구(李書九)는 1774년(영조 50)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을 거쳐 지평·초계문신에 선발되었고, 1786년 홍문관에 들어갔다. 모역사건과 천주교도를 옹호한다는 죄로 한때 유배되었으나, 다시 등용되어 대사성·대사간·이조판서·호조판서·대사헌·우의정을 지냈고, 1825년 판중추부사로 재직하다가 죽었다.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과 문장을 배웠는데, 4가시인(四家詩人)인 이덕무·류득공·박제가 등도 박지원을 따르며 배웠다. 이서구는 사가시인 가운데 유일한 적출이었고 벼슬도 순탄했다. 과거의 고문(古文)만을 추종하는 데서 벗어나 당대의 문장을 중시하며 그 속에서 고의(古意)를 찾았다. 문장은 간단하고 쉬운 것을 귀하게 여기고 복잡한 것은 천하게 여겼다. 고문은 요약하여 기술했으나 매우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정조가 문제삼은 문체의 타락은 세도(世道)의 타락과 직결된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의(理義)와 사실(事實)을 통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는 혁신적이거나 현실적이기보다는 대개 관조하는 자세로 주위의 사물을 관찰하며 고요함을 얻으려 하였다.
홍대용(洪大容)은 1765년(영조 41년)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3개월여를 북경에 묵으면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담론하며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천문학·지리학·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고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천주당(天主堂)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 학습하고 독일 사람으로 청나라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을 하는 할레르슈타인과 흠천감 부감(副監) 고가이슬을 만나 면담했으며, 청나라 관상대(觀象臺)를 여러 번 방문, 견학하여 천문지식을 습득해 오기도 했다. 홍대용의 북경 방문은 당시의 여러 북학파 학자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실학의 도입에서 그 선구적 업적이 크다.귀국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한 유포문답과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을 지었다.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으며 토지 등을 균등하게 분할하는 균전제(均田制),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을 주장했으며, 특히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신분 제도 개혁을 위해 과거제를 없애고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를 고루 등용하며, 신분 등에 관계없이 8세 이상의
류득공(柳得恭)은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제천·양근 등의 군수를 지냈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의 직함을 가져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첨지중추부사에 승진한 뒤 만년에 풍천부사를 지냈다.시문에 뛰어났으며, 규장각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치된 국내외의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많아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다. 발해고(渤海考)에서 요동(遼東)과 간도를 한민족사의 무대로 파악했으며 고구려의 역사 전통을 강조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했고,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시대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파악했다. 발해고는 군고(君考)·신고(臣考) 등 9고(考)로 되어 있으나 권(卷)도 나누지 않은 단권(單卷)의 간략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발해사를 최초로 체계화시키고 이를 한국사의 체계 안에서 파악하였다.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민족이 세운 21개 도읍지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로서 한민족의 주체의식을 되새겨 보려는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