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宋鎭禹)는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하자마자 학생들에게 훈시를 통해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회를 엿보자며 학생들에게 실력 양성론을 전파했다. 1918년 미국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1918년 12월이후부터 1919년 1월 사이 송진우는 김성수와 함께 비밀리에 독립선언과 3.1 대한광복운동을 기획하였으며 일본에 있던 송계백으로부터 일본 도쿄의 상황과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였으며 종교계와 연락하여 기독교세력과 천도교세력의 협력을 위한 밀담을 준비하여 성사시켰고, 3.1 대한광복운동 후에 일경의 첩보망에 걸려 투옥당하였다.1921년 9월 동아일보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이후 조만식 등과 함께 20개 이상의 단체들을 통합하여 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기성회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 김성수, 이광수를 객원논설위원으로 기용하였다. 송진우는 독립운동의 방법을 바꾸어 교육중심주의, 계몽주의, 신중론 등을 주장하였다.1931년 5월 이충무공 유적 보존운동을 시작하여 모금운동과 함께 충무공 알리기에 힘썼다.7월에는 학생 하기방학 브나로드 운동을 시작했
김재규(金載圭)는 박정희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이기도 하다.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6사단장, 방첩부대장, 보안사령관, 군단장 등 요직을 역임한 후 예편하였다. 그 뒤 호남비료사 사장을 거쳐 다시 현역으로 복귀 3군사령관을 거친 뒤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고 국회의원, 건설부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하여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박정희 대통령 시해의 한 이유로 들었다.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그러나 의혹이 풀리지는 않았다.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 및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과의 술자리 도중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발터 PPK k-2로 총기 난사하였다. 이후 1980년 1월 28일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5월 24일 교수형에 처
김광제(金光濟)는 동래경무관(東萊警務官) 재직 중인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관직을 사직하고 친일파 탄핵과 내정의 부정부패 일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전남 고군산도로 유배되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고, 1906년 대구로 옮겨 서상돈과 함께 광문사(廣文社)를 설립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서상돈(徐相敦)은 보부상으로 출발하여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정도의 큰 재산을 모았으며 신사고와 근대의식을 가져 독립협회가 창설되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협회의 재무담당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외세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며 국권수호와 민권신장에 힘썼지만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대구로 내려와 김광제와 함께 광문사를 세워 부사장이 되었다. 광문사(廣文社) 사장인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인 서상돈(徐相敦)은 외국의 선진 학문을 소개하고 실학 서적을 번역 편찬하여 근대사상을 전파하고, 자주자강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敦)은 외세의 간섭으로 인한 국망의 위기가 과다한 국가의 빚, 즉 국채(國債)로 인한 것으로 인식하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의 뜻을 갖게 되었다.1907년 1월 광문사(廣文
임치정(林蚩正)은 1904년 감리교인으로 세례를 받은 뒤 근대 학문을 수학할 목적으로 미국 본토로 건너갔으며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고 소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는 한편, 안창호가 설립한 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안창호·이강(李剛) 등 미주지역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이주 한인들의 취업 알선과 의식개혁에 힘쓰며 한인공동체 형성에 노력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주권침탈을 노골화하고, 해외 한인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자 1905년 4월 공립협회(共立協會)를 결성하여 맞섰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공립협회 활동을 통해 재미동포들에 대한 상호부조 활동과 계몽운동, 그리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항일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상실하자 공립협회를 재미동포의 자치기관이자 국권회복운동의 중심기관으로 키워갔다. 대한제국 영사관을 대신할 공립관을 설치하고 기관지로 공립신보를 창간하여 발행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양하고 국권회복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갔다. 1907년 국내외 한인단체의 통합과 국권회복운동 역량의 결집을 모색하면서 안창호·이강 등과 함께 대한신민회를 발기하였다. 안창호(安昌浩)가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표면적으로는 계몽운동을 펼치
남상목(南相穆)은 1904년 일제가 러시아와의 전쟁 수행을 위해 한일의정서를 늑결하고 강제로 대한제국의 인력과 재원을 수탈하기 시작하였고 5월에는 일제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낙생면(樂生面)의 울창한 수목을 무기 자재로 사용하기 위하여 낙생면과 언주면, 돌마면 등 3개 면민을 동원하여 수목을 벌채하였으며 주민들에게 이를 운반하는 작업을 시켜놓고 노임도 지불하지 않는 만행을 저지르자 일본인 감독관 나가이(中井)를 폭행하는 등 이에 항거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1906년 2월 이강년(李康秊) 대장 휘하에서 참모관으로서 많은 전과를 세우고 단양.제천.연풍.영주.봉화 등지에서 수많은 일본 군경과 항일전을 전개하여 승전하였다. 1907년에는 경기도 광주와 용인지역에서 활동하며 의병대의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 8월경에는 김재선을 좌익장, 강춘선(姜春善)을 후군장, 송주상과 김태동을 종사, 김경화(金景化)와 이시영(李時永)을 포군으로 임명하여, 의병대의 전열을 정비하고 음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유동하(劉東夏)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위해 중국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논의하였다. 유동하(劉東夏)는 유승렬(劉承烈),안중근(安重根),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김성화(金成華),탁공규(卓公奎)와 함께 7인단지동맹(七人斷指同盟)을 조직하고 하얼빈 의거를 계획하였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유동하는 안중근과 하얼빈까지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7시경 유동하(劉東夏)와 안중근(安重根)은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안중근은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9시 30분경 3발의 총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다. 의거에 성공한 안중근은 대한국 만세를 뜻하는 코레아 우라를 크게 외쳤고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유동하(劉東夏)도 뛰쳐나와 대한국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일본 경찰은 유동하를 안중근과 함께 현장에서 체포하였다. 뤼순 감옥으로 압송된 후 일제의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당당히 맞서며 국권수호의
윤희순(尹熙順)은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단발령을 발표하자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사람 의병가 등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촉구하였다. 1907년 일제가 고조 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군자금을 모아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탄환, 유황 등으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접 제작·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하였다. 여자의병 30여 명을 모집하여 의병의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하는 한편, 직접 의병훈련에 참가하였고 후방에서 적극 지원하며 의병운동에 힘을 쏟았다. 8편의 의병가(義兵歌)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겨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 인재를 양성하고자 환인현에 노학당(勞學堂)을 설립하였다. 노학당(勞學堂)의 교장으로 활동하며 학교운영자금을 모으는데 힘을 쏟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의병가(義兵歌) 등 항일애국노래를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양성된 50여 명의 항일운동가는 요동일대를 중심으로 일제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노학당(勞學堂)이 폐교되자 무순(撫順)의 포가둔으로 이주하
문화재관리 사무를 관장,총괄하고 법적,제도적 조치를 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민족문화유산인 문화재를 사전적,예방적으로 관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하는 문화재청은 문화재관리 정책 연구,제도 개선,경영 기획,문화 교육, 정책 홍보 및 지방자치단체,문화재발굴법인,문화재수리업체,연구기관,문화기관 지휘 감독 기능을 강화하여야 하며 발굴 조사,보수 복원,전시 기획 기능이 완벽하므로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국가귀속 문화재 관리기관을 이관받고 대한황실박물관,황실문화재관리소,지방박물관,민속박물관,한국전통문화학교로 직제 개정해야 한다. 문화재 관리체계를 전문화,특성화하고 황실문화재,지역 연고,국가 귀속 문화재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고궁박물관은 대한황실박물관으로 개칭하고 민속박물관은 이전하여야 하며 문화재는 조직,전문인력에 의한 사전적 예방적 관리가 중요하므로 황실,민속,지방박물관의 직급 및 정원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문화재의 특성과 지역 연고에 따라 국보급 문화재를 이관하여야 하며 경희궁,별궁,행궁,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장충단,영희전,장생전,만녕전,장녕전,화령전,집경전,경기전,조경묘,장릉,준경묘를 흡수,통합하여 경운궁에 황실문화재관리소를 신설해
선농단(先農壇)은 농사짓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쳤다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태조 대에 이미 적전령(籍田令)·적전승(籍田丞)을 두어 왕의 농경 시범과 치제의 의례를 관장케 하였다. 서적전(西籍田)은 개성부 동쪽 20리에 있었으며 동적전(東籍田)은 한성부 동교 10리에 있었으며 이를 전농(典農)이라 했으며, 태종 6년(1406) 적전단(籍田壇)을 보수하고 수호하는 인정(人丁)을 두었다. 흥인지문 밖 선농단은 성종 7년(1476)에 쌓았으며, 임금이 친히 경작하여 그 수확으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제사지내던 토지인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경칩(驚蟄) 뒤의 첫 번째 해일(亥日)에 제사를 지낸 뒤 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 기록되어 있다. 선잠단(先蠶壇)은 중국 상고 황제(皇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누에신(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조선 성종 2년(1471)에 처음 쌓고 뽕나무를 심어 궁중의 잠실(蠶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왕비는 궁중 안에 단을 꾸며 내명부ㆍ외명부들을 거
도성의 서산인 인왕산(仁王山)은 그 산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앉은 만큼 그 산록을 따라 도성 안 곳곳에 아늑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가 펼쳐져 있으며 조선 전기에 인왕산 동록(仁王山 東麓)에 인왕사(仁王寺), 내불당(內佛堂), 금강굴(金剛窟),복세암(福世庵) 등의 여러 사찰이 자리잡고 있었다.인왕산 북록(北麓)에는 청풍동(淸風洞) · 백운동(白雲洞)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며, 남쪽으로 옥류동(玉流洞) · 인왕동(仁王洞) · 누각동(樓閣洞) · 수성동(水聲洞)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이 많다. 인왕산(仁王山) 남쪽으로 내려오면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살던 필운대(弼雲臺)를 중심으로 하여 필운동(弼雲洞)의 황학정(黃鶴亭),사직단(社稷壇) 부근의 대송정(大松亭) 및 옥류동(玉流洞)의 등용정(登龍亭),누각동(樓閣洞)의 백호정(白虎亭) · 풍소정(風嘯亭) 등 사정(射亭)이 있어 유명하였다. 또 그 남쪽으로는 왕가의 길지(吉地)라고 하여 일찍이 광조 대에 경희궁(慶熙宮), 인경궁(仁慶宮),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거처하는 자수궁(慈壽宮) 등 새 궁궐의 창건이 이루어졌다. 인왕산록(仁王山麓) 중에서 제일 유수한 계곡에 위치한 옥류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