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만(南九萬)은 송준길(宋浚吉)에게 수학, 165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정언·이조 정랑·집의·응교·사인·승지·대사간·이조 참의·대사성 등을 거쳐서 1668년 안변부사·전라도 관찰사를, 1674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숙종 초 대사성·형조 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같은 해 남인인 윤휴·허견 등을 탄핵하다가 남해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병조 판서가 되어 무창(茂昌)과 자성(慈城) 2군을 설치했으며, 군정의 어지러움을 많이 개선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자 소론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84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영의정이 되었고, 169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 장씨를 가볍게 처벌하자고 주장했으나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사(賜死)하기로 결정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 갔다. 그뒤 유배·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다시 등용되었으나 1707년 관직에서 물러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강릉의 신석서원(申
[더타임스 지만호 칼럼니스트]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간의 서울관악을 단일후보자 경선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꼼수는 진보당 대표 이정희 측의 계획된 조작으로 백일하에 밝혀졌다. 그럼에도 사퇴 거부로 맞서고 있는 이정희 진보당 대표의 뻔뻔한 태도를 보고 야당을 사랑하는 일반국민과 시민단체의 희망2013 승리2012원탁회의 원로회원들(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김상근 목사,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정연주 전 한국방송공사 사장, 김은희 살림 정치여성행동 운영위원, 백승헌 희망과 대안 운영위원장, 황인성 시민주권 공동대표, 박석운 진보연대 공동대표) 마저 경선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나섰다.일개 공당의 대표라면 국민 보기가 부끄러워서 석고대죄를 하여야 함에도 끝까지 버티고 있는 작은 체구가 보여주는 위선의 배짱은 본인도 어쩔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짐작이 간다. 필자가 너무 관대한 생각으로 글을 쓰는 것 같다는 우파지지자의 여론에 몰매를 맞을지 모르겠으나 진정으로 이정희대표가 본인의 뜻과 다르다면 이차에 암흑의 마수에서 벗어나기를 제언해 본다. 즉! 민족해방이며 민중민주를 부르짖는 종북, 친북 단체의 조종에서 탈출하라는 의미이다. 아마
안용복(安龍福)은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3월 박어출과 함께 일본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인슈(因州)로 끌려갔으며 호키슈(百耆州) 번주(藩主)가 막부(幕府)에 보고하자 막부는 설득하여 돌려보내라고 명령했고 6월 30일 안용복은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안용복은 호키슈 태수와 담판을 벌여서 막부로부터 울릉도, 자산도가 조선령 이라는 서계를 받아냈는데, 나가사키에서 대마도(對馬島) 영주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했다.대마도주는 안용복 일행 편에 울릉도 출어를 금지해 달라는 서찰을 보냈으며 조선 조정은 대마도로 보낸 답변에서 울릉도와 죽도를 서로 다른 섬으로 표현했다. 조선 조정은 호키슈에서는 안용복을 잘 대해줬지만 대마도에서 책망한 점을 알아내고 대마도 영주의 행동이 막부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대마도 측 사절에게 막부에게 대마도 영주의 행동을 밝히는 서계를 보내겠다고 말해 사절을 승복시켰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화답문을 고쳐서 울릉도와 죽도가 서로 같은 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일본인들이 조선 영토에 들어와 안용복 일행을 데려간 것은 실책이라고 했다.1695년 3월에 대마도 번주 소요시쓰구가 죽고 그 아우인 소요시미치가 대마
채응언(蔡應彦)은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초기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이진룡 의병부대의 휘하 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평안남도 · 강원도 · 황해도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08년에 황해도 안평의 순사주재소와 수안 헌병분견소를 공격하고 함경남도 마전도 순사 주재소를 급습하여 무기를 노획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1910년 경술늑약 늑결 이후에 국권회복을 위하여 의병활동을 계속하여 김진묵 의병장의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3 - 4백명의 의병부대를 직접 이끌고 경기도 · 강원도 · 황해도 · 평안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근거로 효과적인 유격전술을 구사하였다. 1913년에는 황해도 대동리와 선암의 헌병분견소를 기습하여 일본군 헌병을 처단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평남 성천 산악지대를 근거로 치열한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20명 이상의 일본 군경과 일제에 동조하는 세력을 처단하였고 의병부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매진하였다. 이에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하여 적괴 채응언수색대를 조직하는
한성수(韓聖洙)는 1944년 1월에 학병에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투입되었고 강소성 서주지역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천신만고 끝에 중일전쟁의 최전방인 부양에 위치한 한국광복군 3지대에 입대하였으며 광복군 3지대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10분교에 임시로 설치한 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부양에 잔류하여 3지대의 기간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김학규 지대장에게 간곡히 요청하여 상해를 중심으로 한 화남지역 공작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에 홍순명, 김영진 등과 함께 상해에 침투하여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고 공작거점을 마련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군자금을 요청하기 위해 상해에 거주하는 한국인 부호 손창식에게 접근한 한성수는 1945년 3월 13일에 동지 7명과 함께 상해 주재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일본군을 탈출한 전력 때문에 더욱 잔혹하게 고문을 당했으나 한국광복군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일본군 군법회의(軍法會議) 법정에서 일본어 사용을 끝까지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태평양전쟁은 반드시 패할 것이며 한국광복군이 당한 희생만큼 침략자인 일본도 고스란히 당할 것이라고 질타했으며 일본군 군법회의(軍法會議) 재판정을 상대로 죽음을 두려
이동휘(李東輝)는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분개하여 강화진위대 동지들과 항일의병봉기에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전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고 특히 구국교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강화와 평양 등지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세우고 국학 및 근대학문과 군사교육을 병행하여 구국인재양성의 요람으로 활성화시켰다. 1908년에는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한편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투옥되었다.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한 이동휘는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고, 1913년에는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권업회(勸業會)에 참여하는 등 한인의 자치와 결속을 도모하고 국내에서 전개하던 애국계몽운동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무장투쟁론을 구현하기 위해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건립을 추진하고 독립군을 육성하기 위해 대전사관학교(大甸士官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좌·우익노선과 외교독립론·무장독립투쟁론이 하나로 결집되어 상해 통
김복한(金福漢)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요로 전국이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행동에 나섰다. 12월 1일 이설·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성에서 거병하여 창의소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거사는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한성으로 압송되어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조 광무제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는 중차대한 위기에 처하자, 12월 2일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자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구금된 김복한은 낙향하여 안병찬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1906년 5월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한 의병 부대가 홍주성을 점령하였으나, 홍주의병도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김복한은 의병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파리강화회의에 대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영남과 호서의 유림들이 연대하여 연명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냈으며 이 파리장서운동으로 공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최석순(崔碩淳)은 1919년 남간도의 의병계열 독립군 단체인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집서(輯西)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8월 남간도 독립군 단체의 통일조직인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의용군 2중대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1924년 4월에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동단결을 해야 한다는 선언서에 남만 군인대표 78명과 함께 서명하였으며, 5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가 결성되자 참의부 의용군 2중대장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참의부 최고 지도자인 참의장의 역할을 겸임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지휘하는 등 혁혁한 활동을 벌였다. 참의부는 1924년 5월 19일 압록강 일대를 순시 중이던 사이토 총독을 기습 공격하여 국경지대의 안정을 대내외에 선전하려던 총독부의 계획을 무력화시켰다. 일제는 남간도지역의 독립군 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계획하여 실행하였다. 1925년 2월 참의부(參議府) 참의장(參議長) 겸 2중대장으로 국내 진공작전과 군자금 모집, 일제 기관 파괴 등의 안건으로 참의부 소속의 5개 중대 군사회의를 집안현 고마령(高馬嶺)에서 주재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제의 초산경찰서 경찰대 65명은
최용신(崔容信)은 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 대표로 참가하여 본격적으로 YWCA의 농촌계몽 사업에 참가했다. 1929년부터는 황해도 수안과 경북 포항 등지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1931년 10월 YWCA 농촌지도원으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천곡(샘골)에 파견된 최용신은 예배당을 빌려 강습소를 개설하고 아동과 청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에 힘을 기울였다. 생활 개선과 농가 부업 장려를 위한 부녀회와 청년회를 조직하여 주민들 상호간에 신뢰감을 조성하는 데도 앞장섰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는 등 어려움은 많았지만 굳은 노력으로 1932년 5월 강습소는 정식인가를 받았으며, 천곡학원(샘골학원)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유지들 및 YWCA의 보조로 1933년 1월 낙성식을 거행했다. 보다 장기적이고 실천적인 농촌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34년 새로운 지식과 학문을 충족시키고자 일본에 건너가 3월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하여 뒤늦게 향학열을 불태웠으나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했다. 9월 귀국과 동시에 YMCA 보조금 중단으로 운영난에 빠진 천곡학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명하(李命夏)는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늑약이 강제 늑결되어 국권이 위협받고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자 과감히 관직을 버리고 쓰러져가는 국권을 바로 잡고, 국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류인석의 문하로 문경에서 거의한 이강년 의병진에 참여하여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군경과 무장투쟁을 벌이고, 친일관리들을 숙청하여 민족의 기를 드높였다. 이강년 의병장과 함께 1907년 말 13도창의군을 결성하여 한성진공작전을 전개하는데 힘을 보탰다. 이강년 의병장의 지시로 각지로 다니며 의병운동의 재기를 촉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 경술늑약이 늑결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진룡 의병장과 함께 무장투쟁을 계속하여 갔다. 국내에서 3·1 대한광복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 일대의 의병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단을 창단하고, 무장대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대한독립단 무장대(武裝隊)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의주(義州)·철산(鐵山)·용천(龍川)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조직인 보합단(普合團)과 연계투쟁을 전개하면서 의주·용천·선천 등지에서 친일파 관리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