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李商在)는 1881년 박정양(朴定陽)이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으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 동행하였던 홍영식(洪英植)·김옥균(金玉均)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 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 독판(內務 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 참찬(經筵 參贊)이 되었고, 학무아문 참의(學務衙門 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新敎育令)을 반포하여 실시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內閣總書) 및 중추원 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다. 1905년 의정부참찬(參贊)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준비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 가담하였고 전영(前營) 정령관(正領官)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1893년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1895년 12월에 귀국하였으며, 1896년 1월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서재필은 1896년 4월 정부 예산을 얻어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뜬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 대한광복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대한제국 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1870년경 개화사상가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 준비를 하던 유길준(兪吉濬)은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읽은 후 과거를 포기하고 실학과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에 관한 책을 탐독하게 되었으며 1877년 2월 박규수가 병사한 후 김윤식(金允植)과 함께 시인(詩人) 강위(姜瑋)의 지도를 받으면서 온건개화파가 되었다. 1882년 10월 13일 박영효를 수신사(修信使)로 하는 사절단(使節團)은 3개월간 일본의 각 기관을 시찰하고 지도자들과 만났을 뿐만 아니라 각국 사절과도 폭넓게 접촉하여 의견을 교환했다.유길준은 사절의 통역을 맡아 활약했다. 외아문 주사(外衙門 主事)를 지내고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신문 발간을 도왔다. 보빙사(報聘使)의 수행원이 되어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았고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으로 가 E. S.모스에게 8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고 바이필드의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유럽 여행 후 1885년 12월 16일 인천에 도착했고 1895년 서유견문(西遊見聞)을 발간하였다. 일본에 있던 유길준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고조 광무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늑약이 늑결되었다는 소식
이시영(李始榮)은 1887년 형조좌랑 등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와 경연청 서연관(書筵官)을 지냈다.1892년 이후 홍문관교리·홍문관수찬, 승정원 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후 승정원 우승지,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 이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 수석참의 등을 지냈으며 1905년 외부 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이 되었고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반대하였다. 1907년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 1908년 법부(法部) 민사국장(民事局長), 한성부재판소 소장, 한성고등법원 판사 등을 지냈다. 1909년 대한제국 법부 법률기초위원이 되었다. 1910년 8월 남간도의 유하현 추가보(柳河縣鄒家堡)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11년 4월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露天群衆大會)를 열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창설하고 이상룡을 사장에 추대하여 일면 민생(民生), 일면 교육(敎育)이라는 두가지 목표를 내걸고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였다. 1912년 일제 밀정의 감시를 피해 신흥강습소를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신채호(申采浩)는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1월 20일 장지연의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 집필을 도왔고 장지연이 투옥되자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6년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발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하였으며 기호흥학회, 가정잡지, 대한협회 월보 등에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1910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新韓村)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4년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는데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1915년 북경에 체류하고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박은식(朴殷植)은 1898년 9월 장지연·남궁억·나수연(羅壽淵)·류근(柳瑾)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 보급하였으며 공동주필에 취임하였다.1904년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주필이 되어 사설을 썼으며 1906년 신석하, 김달하, 김병도와 함께 서우학회(西友學會)를 결성하여 기관지 서우의 주필로 취임하였고 1908년 서북학회를 창설하고 서북학회월보를 창간하였다. 1907년 비밀결사회인 신민회가 결성되자 그는 그 곳에 가입하여 교육ㆍ출판 부문에서 민족계몽운동에 힘썼다.1911년 4월 중국 환인현 흥도천에 머무르면서 동명성왕실기 ㆍ 몽배금태도 ㆍ 명림답부전 ㆍ 천개소문전 ㆍ 대동고대사론 등을 집필하였고 1915년 한국통사를 간행하였으며 1919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집필하여 책으로 냈다. 1919년 10월 15일 국민교육의 연구 장려 및 유학생 파견, 지도 등의 목적으로 하는 대한교육회(大韓敎育會)를 상해에 조직하였으며 회장 겸 편집부원으로 활약하였다.임시정부가 1925년 3월 대통령 서리 겸 국무총리 박은식을 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으나 7월 국무위원제로 바꾼 후 국무령에 이상룡을 추천하여 당선시켰다.
양기탁(梁起鐸)은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구국 계몽 운동에 뛰어들었고 개혁당에 참가했다.1904년 궁내부에서 영어 통역을 맡게 되면서 베델과 함께 영자 신문 코리아 타임즈를 발간했다. 1905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는데 참여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에 가담하였다. 1907년 안창호의 신민회에 참가하였고 간도에서 편강렬과 함께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인 의성단을 결성하였고, 흩어진 운동 단체를 통합한 통의부와 정의부, 고려혁명당, 국민부 결성에 가담했으며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1933년 10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고 1935년 10월까지 재임하였다.
이상룡(李相龍)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서 거의하고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年)을 지원했으며 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으며,1909년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지내면서 시국강연을 개최했다. 1909년 신민회 간부 비밀회의에서의 결정에 따라 독립운동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1911년 2월 서간도로 망명했다. 1911년 최초의 간도지역 항일자치단체로 개간과 영농에 종사하는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여 경학사장에 추대되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했으며 산업·교육 우선주의와 군사중심주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2년 경학사를 발전시켜 퉁화 현 합니하(哈泥河)에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고 허혁(許赫)에 이어 단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신흥강습소도 이전하여 제2의 기지를 정했다. 1919년 3·1 대한광복운동을 계기로 서간도(西間島)의 독립운동도 무장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류허현 삼원보(三源堡)에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했고 임시군정부(臨時軍政府)를 조직한 후 대
윤봉길(尹奉吉)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편지를 남긴 채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고 간도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의 김태식(金泰植)·한일진(韓一眞) 등과 함께 간도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했으며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고 계몽강연을 했다. 1931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해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동생 안공근(安恭根)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교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말총모자 공장 미리공사(美利公司)에서 일을 하며 노동자 친목회와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활발히 활동하면서 영어학교에도 다녔다. 김구는 일제가 상하이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전승축하기념식을 개최할 계획을 탐지하고 폭탄 투척 거사를 준비했으며 윤봉길은 4월 26일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된다는 내용의 입단선서를 했다.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식장에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폭살(爆殺)했다. 거사 직후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훙커우 공원 거
[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정치권의 관심사로 떠오르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내년 총선출마에 대한 문제가 지역구 출마로 결론이 나자 갑론을박이 한창이다.한때 수도권 또는 비례대표로 출마 할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대선을 위해 총선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마저 나온 상황에서 박 전 대표의 대구 달성지역 출마결심은 의외의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박 전 대표의 이러한 결정은 내년 총선에서 박 전 대표의 지원을 내심 바라고 있던 많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는 충격적인 결과다.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결정은 친박계 의원들 사이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라고 이야기들 하고 있다.필자는 이러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바람을 떠나 냉정히 분석해 볼 때 박 전 대표 자신의 대선 승리를 위해서 지역구는 물론 일부에서 제기하는 비례대표마저 포기하는 결단을 보여 줘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현재 여야 대권 주자 중 지지율이 월등히 앞서가고 있는 박 전 대표에게 내년의 대선은 가장 좋은 기회이자 대통령에 당선될 확률이 그 어느 때 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한나라당 내부의 예상치 못한 변화와 야권의 단일화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최후의 진검승부를 한다는 사즉필생(死卽必生)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