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타임스 장지연 칼럼니스트]4.27재보선의 참패로 이어진 한나라당의 위기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부산저축은행 사건으로 터진 부산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분노가 김황식 국무총리가 감사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이미 그 문제점을 청와대에 보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정부의 불신으로 확산되고 있다.또한 어느 철없는(?)자문위원의 몰상식한 행동은 한나라당 전체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다. 사실 한나라당 정책위원회의 자문위원은 그 다지 중요한 직책도 아니고 책임이 있는 자리도 아니다. 한나라당 정책위원회에서 다 방면의 의견을 청취하고 정보를 공유하고자 2010년에 신설된 비상근 기구로 분야별 수 십 명씩 수 백 명이 참여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반 국민들은 한나라당 자문위원이라고 하니 높은(?) 직위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으로 비추어져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불러오고 있다. 소위 겨우 “저런 자질을 가진 사람이 한나라당 자문위원이라니...” 한나라당의 수준을 알만하다는 식이다.물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방법과 논리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한나라당 직함을 내세우며 공개한
[더타임스 여동활 칼럼니스트]친박은 일전불사를 각오해야 살아남는다,전투는 시작됐다,그러나 죽기를 각오한다면 반드시 희망은 있다,현재 친이계의 허접한 숫자에 고개숙이면 미래는 참담하다,한나라당은 이미 붕괴수준을 밟고있는 식물정당이다,아직도 미련이 남는가?과거 열린우리당이란 거대정당이 추락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바라본 적도 있다.이제 또 하나의 열린당이 될 한나라당도 비참한 말로가 시작되고 있다.죽어가고 있는 줄도 모르는 이재오는 이제 휘하의 추종자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친박들을 우롱하고 있다. 후안무치하다반드시 퇴출돼야 할 이재오는 마지막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전국을 배회하면서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몸부림을 칠 것이다.한나라당은 이재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왜 이재오를 방치하는가 ?그가 ‘개헌’이라는 낡아빠진 헝겊조각을 휘날리며 계속 정국을 유린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어떻게 살린 한나라당인가?피눈물을 흘리면서, 사족이 짓무르면서 한번만 더 살려달라고 국민들에게 매달렸던 박근혜 전 대표의 울부짖음을 벌써 잊었는가?그것을 잊고 있는 친이계는 반드시 국민들에게 냉혹한 칼날의 심판을 받아야된다.홍준표는 또 뭐라 했는가? 홍사덕 의원이
[더타임스 여동활 칼럼니스트]사실이라면,모든 친박들은 여기에 깊은 고뇌를 해야된다,분명히 현재 한나라당은 국민에게 희망을 앗아간 정당이다박근혜 전 대표의 앞날을 위해서라기보다 대한민국의 국운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 정치는 환골탈태해야 된다.2012년 대선이 바로 대한민국 정치를 환골탈태시키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국민에게 믿음을 주고 정치에 대한 불신을 불식시킬 수 있는 선진정치의 표상을 심어줄 계기가 될 수 있다.바로 국민과 정치가 서로 믿음을 주고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박 전 대표의 정치신념을 바탕으로 국운을 상승시킬 시대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과연 친박진영에서 그 중요한 시대전환을 위해 통찰력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가?무척 의구심이 많이 가는 이때에 친박좌장격인 홍사덕 의원의 분당설 제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정치세계는 온갖 암투들이 난무하는 곳이지만 그래도 싸움을 해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된다.바로 국민들도 그 확고한 정치력에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고 표로서 믿음을 준다.아무리 국민을 위해서 일하고 싶어도 국민들에게 확고한 정치이념을 심어주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사정없이 외면하고 만다.바로 정권창출은 혁명적 이념이 매우 중요하다,
[더타임스 -이종납 편집장] 단도입적으로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민심대장정을 떠나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민심대장정’이란 국민속으로 들어가 현장에서 일하면서 민심을 읽고 민초들의 고민을 들어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지난 2007년 대선전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민심대장정에 나서 언론과 여론의 우호적인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당시 손 전 지사는 “민심대장정을 통해 국민들에게 달콤하고 향기로운 말을 해주려는 게 아니라 국민들의 얘기를 직접 들으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뜬금없이 자다가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정몽준 전 대표가 적당한 때를 잡아 1000일,1000일이 너무 길면 100일 민심대장정에 나서 보면 어떻겠는가 하는 생각이다.정 전 대표는 지금 FIFA부회장직도 내놓았고 4.27 재보선도 다 끝난 마당에 100일 민심대장정을 통해 민심을 직접 듣고 민심속에 들어가 민초들과 함께 땀흘리며 민심을 한번 진지하게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 전 대표는 지금 5% 미만으로 국민지지도는 미흡하지만 여전히 한나라당내 유력대선주자로 꼽히고 있고 제 자신도 열심히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며 대선출마에 강한 의지를 피력한바
심남일(沈南一)은 1905년 을사늑약 늑결을 계기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었고 곡창지대인 호남 일대에 일제의 경제 수탈이 극심해지자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1907년 후반 전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여 기삼연 의병장 휘하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8년 2월 의병장 기삼연이 체포, 총살되고 김율, 김태원 등 수뇌부를 비롯한 다수의 의병이 전사하여 의진이 와해되자 굳건한 항일의지로 의병을 다시 불러 모아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선봉-중군-후군의 전통적인 삼군체제를 확립하고 의병들이 지켜야 할 10개 조항을 고시하여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키는 등 의진의 기강을 바로 세워 민심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대일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을 비롯하여 1909년 음력 7월 장흥 봉무동 전투까지 일본 군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등 전남 중남부 지역 대표적 의병부대로 성장한 심남일 의진은 일본의 국권강탈과 경제적 침탈, 단발 강요, 일본인관리의 임명, 군대해산과 고조 광무제 강제 퇴위 등에 대하여
곽재우(郭再祐)는 1592년 음력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의주(義州)로 피난 소식이 날아오자, 같은 달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고, 일본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대첩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선두에서 싸웠기 때문에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렸다. 1592년 5월 함안을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 도하작전을 전개하는 왜군을 추격, 대승을 거두었다. 붉은 비단으로 된 옷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와의 악감정 때문에 누명을 쓰고 체포,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의 특별 건의로 석방된 후, 조선 정부는 그의 의병 활동의 공을 높이 사 같은 해 음력 7월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라는 무관직을 내렸고, 음력 10월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음력 12월 성주목사(星州牧使
윤선도(尹善道)는 1616년(광조 8)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류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慶源)·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1628년(인조 6)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다.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9년 효
이황(李滉)은 152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급제했다. 1533년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했으며,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이후 박사·전적·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고 1543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46년 낙향하여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다. 풍기군수 재임 중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실현했는데 조선시대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549년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52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7년간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68년(선조 1)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중용과 대학에 기초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
이이(李珥)는 1548년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1555년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였다. 1568년(선조 1) 천추사가 명나라로 갈 때 서장관으로 동행한 뒤, 1569년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그해 음력 9월 송강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1573년(선조 6)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국가적 근심거리라고 지적하였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 사항을 열거하였다.1574년(선조 7) 황해도 감사로 약 반년간 재직하였다. 그 후 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기초 서적인 격몽요결을 저술했다. 1581년 음력 9월 홍문관 부제
김일손(金馹孫)은 1486년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올랐다. 14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주서(注書)·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질정관(質正官)으로 있을 때 명(明)에 가서 정유(鄭愈) 등의 학자와 교유하고, 정유가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을 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전파했다.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류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했고,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있을 때는 세조찬위(世祖纂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1498년(연조 4) 류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 때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의 언행 가운데 훈구파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은 소훈 윤씨(昭訓 尹氏)에게 지나치게 많은 전민(田民)과 가사(家舍)를 내렸다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했고, 조의제문을 사초에 싣고,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절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