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10월 상순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둥근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천제를 봉행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으며 환구제(圜丘祭)는 10세기 고려 성종(成宗) 대에 제도화되고 조선 세조(世祖) 대에 폐지되었으며 1897년 고조(高祖)는 대한제국(Daehan Empire)을 건국하고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의해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황단을 축조하고, 10월 12일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황단에 나아가 환구제를 봉행하고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광무 원년 백악과 목멱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大安門) 앞에 제천단 황단(皇壇)을 축조하였으며 1층은 장광이 144 척이며 둥글게 돌로 쌓아 석 자 높이로 쌓았고, 2층은 장광이 72 척이며 석 자 높이로 쌓았고, 3층은 장광이 36척이며 석 자 높이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바닥은 벽돌을 깔고 황단(皇壇) 주위를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세웠고 남문은 문이 셋이다. 1910년 불법 무효한 경술늑약에 의한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 후 환구단의 건물과 터를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훙서(薨逝) 후에 묘호(廟號)가 올려진 조선의 추존(追尊) 왕은 모두 9명이다. 추존 왕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의 신분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아버지, 그리고 태조의 4대 선조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이다. 태묘(太廟)에 신위를 모셔서 왕위에 오른 왕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왕릉의 능제에 맞게 규모를 키우거나 석물을 추가하여 능도 더욱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삼촌의 왕위를 계승한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은 세조의 맏아들로 의경세자에 봉해졌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예종 역시 1년 남짓한 재위 기간을 채운 뒤 병사하였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과 잘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대비는 둘째 아들인 잘산군으로 하여금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고, 그가 9대 왕인 성종이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대한민국이 국격 낮고 위험한 장사치 나라로 급변한 것 같다. 아랍에미레이트로부터 원전을 수주하면서 군대를 덤으로 끼워 넣기 한 것도 뒤늦게 드러나고,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에 공병부대를 동원함은 물론 속도전으로 밀어재끼는 탓에 군인이 사고로 죽는 등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몰염치 정권은 그 끝을 모를 정도로 엉뚱한 곳에 저돌적이다. 이러한 정권은 양심세력이 하루빨리 퇴진시켜야 옳다. 아니 독불장군 식 막무가내 정치를 하는 세력은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모든 국민이나 정치인이 나서 반드시 퇴출시켜야 이 나라 금수강산이 보전되고, 백성이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안보를 등한시 하는 정권은 여, 야나 우익, 좌익의 이념을 떠나 이미 공공의 적이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해도 안보를 장신구로 여기는 정권은 나라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돈으로 바꾸려는 장사치에 불과하다. 입에 돈 잔뜩 물고 적군에 죽을 운명이다. 어찌하여 군 면제정권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보다도 경제적 이득, 그것도 재벌에 편중되는 온정하나 없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신봉하는가. 복지와 군 장비 예산은 삭감한 채 4대강에 올인하는 이상한 정권에 많은 사람들이 신물을 낸지 오래다. 중요한
대한제국 황제릉(皇帝陵) 홍릉(洪陵)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동원이실합봉릉(同原二室合封陵)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는 1897년 11월 21일 청량리 천장산에 안장됐다가 1919년 1월 21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붕어(崩御)하자 그 해 3월 4일 남양주 금곡으로 이장해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와 함께 합장하였고 봄 ,여름,가을,겨울의 사시,동지(冬至) 후 3번째 술일(戌日)의 납일(臘日)과 한식,단오,중추의 속절(俗節), 초하루와 보름의 삭망(朔望)에 친제(親祭)를 봉행했다. 초대 고조 광무제와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의 능인 홍릉(洪陵)은 명(明)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능역(陵域)을 조성하였으며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參道)가 3개의 단으로 되어 있고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전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석물이 참도와 침전 사이에 배치되어 있고 문인석, 무인석,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이 순서대로 참도(參道)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릉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2대 순종 융희제와 순명황후 민씨(純明皇后閔氏)
왕릉,황제릉은 모두 42기인데 북한 개성에 있는, 태조의 첫 번째 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인 제릉(齊陵)과 조선의 2대 정종 및 그 비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인 후릉(厚陵)을 제외한 40기가 대한민국에 남아 있다. 국왕이나 왕후는 5개월만에 왕릉에 묻힌다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명시되어 있으며 국왕이나 왕후가 승하(昇遐)하면 곧바로 능호(陵號)를 정하고, 왕릉으로 삼을 만한 좋은 터를 마련한 뒤 왕릉의 조성 공사에 돌입하여 장례를 치르기 전에 완공하였다. 반정(反正)을 통해 국왕이 된 인조는 즉위한 뒤 자신을 낳아준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면서 장릉(章陵)으로 격상되었다. 단종의 능은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의 신분으로 졸했기 때문에 노산묘(魯山墓)로 불리었다가 숙종 대에 단종으로 복위되면서 장릉(莊陵)으로 조성되었으며 단종의 능은 무인석(武人石)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 태조의 두 번째 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태조가 승하(昇遐)한 후 태종에 의해 신덕왕후의 능이었던 정릉(貞陵)이 폐릉되었다가 현종 대에 이르러 태조의 계비로 인정되어 다시 복위되고 능도 왕릉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국왕으로 재위하였다가 실정
요즘 나라가 어수선하다. 정부와 위정자는 국민 신뢰를 먹고살아야 하거늘 여당 내 일부 인사는 물론 국가 정책의 중요 결정권자까지도 금세 들통 날 거짓말로 불신을 자초하여 원성을 사고 있다. 특히 국무위원 중 상당수가 군 면제자로 구성된 전무후무한 요상한 정권에서 연평도 난리 통에 젊을 때 입으랄 때는 행방불명까지 돼 가면서 군복을 안 입더니, 남들은 다 양복입고 다니는 느긋한 나이에 군 야상 차림에 보온병 들고 ‘이것이 포탄 탄피’라며 우겨대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여당 대표인 안상수(네티즌 사이에서 ‘행불’로 유명)씨였다. 과연 그 모습을 보니, 콜라병 들고 요리저리 하늘에서 내린 선물이라며 즐거워하던 부시맨을 보는 것 같았다. 그나마 북한군의 포격으로 불안에 떠는 국민에게 안 대표는 군 면제자답게 쓴 웃음을 선사했다며, 칭찬이라면 칭찬(?)이라 할 비판을 듣고 있다. 마치 상가집에서 알지도 못하면서 잘 안다며 떠벌이는 한 미치광이 때문에 엄숙해야할 곳에서 포복절도하는 격이다. 이에 초등학생을 포함한 많은 국민으로부터 보온병 출신 병역 면제자라며 조롱받는 여당 대표가 불쌍해 보일 뿐이다. 물론 자업자득이지만. 절대 국민 위에 설 수 없는 자들이 어떻게 운
조선 왕비는 간택(揀擇) 절차를 거쳐 책봉(冊封)되었는데 금혼령(禁婚令)을 공포하여 반가의 13-17세 규수들의 혼인을 일시적으로 금지하면 반가에서 사주와 함께 부, 조, 증조, 외조의 이력을 기록한 간택단자(揀擇單子)를 예조에 올리면 예조는 간택단자를 모아 국왕에게 올렸다. 왕비의 간택(揀擇)은 왕실의 어른인 대비(大妃)가 주관하였으며 대비(大妃)는 간택단자(揀擇單子)를 보고 그 중에서 가문과 사주가 좋은 규수를 골랐다. 가례도감(嘉禮都監)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간택(揀擇)과 가례(嘉禮)를 주관하게 하였다.조선 왕세자(王世子)는 동궁(東宮)에 거처하였고 왕비는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揀擇)되어 입궁하였으며 세자빈은 왕세자(王世子)가 왕위에 즉위한 후 정식 왕비에 책봉(冊封)되었고 국왕이 된 후에 국혼(國婚)을 하는 경우도 있다. 왕비의 간택(揀擇),책봉(冊封)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납비의(納妃儀)에 의거하여 시행되었다. 납비의는 택일(擇日), 납채(納采), 납징(納徵), 고기(告期), 책비(策妃), 명사봉영(命使奉迎), 동뢰(同牢),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전하회백관(殿下會百官), 왕비수내외명부조회(王妃受內外命婦朝會)의 절차로 이루어졌다.
1904년 2월 23일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勒結)하고 한반도,간도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1897-1919)의 국방 및 재정의 실권 장악, 그리고 외교의 감독과 조약 체결권의 제약을 통한 대한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을 노골화했고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8월 영일동맹(英日同盟)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9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대한제국의 독점지배에 대한 승인을 얻어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에게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했다. 일제(日帝)는 을사늑약의 늑결을 위해 고조(高祖) 광무제에게 협박을 거듭했으나 불응하였고 1905년 11월 17일 고조 광무제가 불참한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하자 이토 통감은 을사5적(乙巳五賊)만으로 회의를 다시 열고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불법 늑결(勒結)하였고 1906년 설치된 일제(日帝) 통감부(統監府)는 대한 황실 궁내부(宮內府)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를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하고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여 현재 교육기관,문화기관과 외국에서 소장중이다. 대한제국(Daehan Empire) 황실 미술공예품은 1909년 11월 1일 순종 융희제가 창경궁(
프랑스란 나라가 국격이 매우 낮은 것 같다.프랑스와 우리나라는 1866년 그들 함대에 의한 조선 침략이라는 악연으로부터 출발했다. 흥선대원군에 의한 프랑스 신부 9명에 대한 살해에 대하여 조선인 9천 명을 보복 처단하겠다고 침략한 그들은 몇 차례 중국으로 퇴각하면서 다시 침략을 반복, 결국 강화성을 한 달여 간 점령했다. 같은 해 음력 11월 18일 물러날 때 프랑스군은 강화성 관아에 불을 지르고, 은괴와 서적, 무기, 보물 등을 약탈 한 후 청나라로 철군했다. 역사에서 말하는 병인양요이다.이 때 프랑스가 절도해 간 외규장각 도서가 다시 고국에 반환 기미가 보이게 된 계기는 노태우 정권 시절 그들의 고속철인 떼제베(TGV)와 독일의 이체(ICE), 그리고 일본의 신칸센(新幹線)이 치열하게 경합할 때였다. 신칸센보다 의자 폭도 좁고 소음도 많은 프랑스 철도기술이 한국에 도입된 이유는 여럿이지만 로비 문제로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하지만 프랑스가 강화도로 침입, 조선군인 죽이고 가져간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도 한 몫 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그동안 떼제베는 한국 고속철도의 상징으로 발전 KTX라는 이름하에 대한민국 산하를 달리고 있다.그런데 어찌
대한민국은 아직도 일제시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광복이 된지 어언 반세기도 넘었지만 아직도 일제 통치 때 정착된 부락(部落)이란 말을 우리 스스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가 스스로 ‘마을’이나 ‘동네’라는 좋은 행정용어 대신 ‘부락’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일본을 아는 필자로서는 너무나 답답하다 우리는 아직도 여러 부문에서 일본어의 잔재를 털어 내지 못하고 외래어로서 사용하고 있으니, 언어의 독립은 요원한 것 같다. 특히 일제가 한국을 멸시하면서 부르던 ‘부락’이라는 단어만큼은 하루빨리 사용을 해서는 안 되는 용어다. 그런데도 시골에 가면 아직도 많은 마을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부락’이란 바로 일제가 한국인에게 심어놓은 나쁜 용어다. 순수한 우리말 마을´이나 ‘촌락’ ‘동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일본인 공무원들이 한국인을 깎아내리기 위해 사용하게 된 ‘천민동네’라는 의미의 부락이란 단어를 자꾸만 사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스스로 우리 동네는 ‘천민들이 사는 마을 입니다’하고 선전하는 꼴이다. 만일 일본인들이 관광 와서 그런 마을에 들린다면 ‘역시 한국에는 아직도 향소부곡과 같은 천민마을이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