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朴齊家)는 1778년 이덕무와 함께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기균(紀畇)·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이정원(李鼎元)·포자경(鮑紫卿) 등 청을 대표하던 석학들과 교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선진문물에 감명을 받아 여러 가지 선진기술과 도구를 배우고 연구함으로써 앞으로의 학문적 기초를 세웠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北學議) 내편·외편을 썼다.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정조가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중세적 신분질서 내 서얼층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1777년 3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공포하고,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서얼 출신들이 하급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박제가는 이덕무·류득공·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더불어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13년간 규장각의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간행하는 한편 국내외의 서적과 저명한 학자들을 접하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786년 정조가 왕명으로 관리들에게 시폐(時弊)를 시정할 구폐책(救
이덕무(李德懋)는 박제가(朴齊家)·류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박지원(朴趾源)·박제가·홍대용(洪大容)·서이수(徐理修)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서건학(徐乾學) 등 중국 고증학파의 학문에 심취하여, 당대의 고증학자였던 이만운(李萬運)에게 지도를 받았다.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산천·도리(道理)·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 박제가·류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外閣檢書官)이 되었다. 근면하고 시문에 능했던 이덕무는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이 되었으며, 사도시주부·사근도찰방·광흥창주부·적성현감 등
박지원(朴趾源)은 1757년 민옹전(閔翁傳)을 지었고, 1767년까지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실려 있는 9편의 단편소설을 지었다. 이덕무·류득공·이서구·박제가가 4대시가(四大詩家)로 일컬어졌는데 모두 박지원의 제자들이었다. 1780년 진하별사(進賀別使)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청(淸)의 베이징에 갔다. 5월 25일에 출발해 8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렀고, 10월 27일 한성에 돌아왔다. 이 연행에서 청의 문물과의 접촉은 이용후생(利用厚生) 위주의 사고로 전환하게 되었다. 박지원은 양반사회를 비판하고 사회모순을 지적한 호질(虎叱)·허생전(許生傳) 등의 소설도 들어 있고, 중국의 풍속·제도·문물에 대한 소개와 조선의 제도·문물에 대한 비판이 들어 있는 문명비평서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저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열하일기는 필사본이 많이 유포되었는데 자유분방하고도 세속스러운 문체와 국내에 만연되어 있던 반청(反淸) 문화의식에의 저촉 때문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루하고 보수적인 소화의식(小華意識)에 젖어 있는 지식인들의 비난 때문에 정조도 1792년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라는 처분을 내렸다. 1
유홍기(劉鴻基)는 오경석이 중국에서 구해온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서적을 읽고, 무력을 동원하여 동양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서양세력의 실체와 아편전쟁 이후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가던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되어 점차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1877년 박규수가 죽자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이동인(李東仁) 등의 청년들을 소개받아 함께 지도하였다. 1882년 기구 축소와 감원을 통해 국가 재정을 절감하기 위해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하고, 책임자인 구관당상(句管堂上)에 어윤중(魚允中)을 임명했다. 감생청(減省廳)은 약 6개월 동안 존속하다가 수구파의 반대로 폐지되었다.유홍기는 종 9품 부사용(副司勇)에 임명되었다가 정 9품 사용(司勇)으로 승진되었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동인(李東仁)은 1879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정세를 시찰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했다. 그해 6월초 일본 혼간사의 부산 별원(別院)에 와 있던 승려 오쿠무라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의 혼간사에 체류하며 일본어를 익히면서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 변모된 일본사회를 살펴보고, 한성에 있는 김옥균·박영효에게 서구 문명을 소개한 서적 등을 보내면서 계속 연락을 취했다. 교토에서 10개월간 머무른 뒤 1880년 4월 도쿄로 가 혼간사 승려들의 알선으로 일본의 정치가들과 접촉했다. 그해 8월 수신사로 온 김홍집(金弘集)과 친교를 맺어 김홍집과 함께 9월말 귀국했다. 귀국 후 김홍집의 소개로 민영익(閔泳翊)의 집 사랑방에 거처하면서, 민영익의 주선으로 일본의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고조 광무제에게 상주(上奏)해 고조 광무제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고조 광무제는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쥰센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에 따라 미국과 조약을 맺기를 원했다. 1880년 10월 원산을 거쳐 일본에 도착한 뒤 청나라 공사 하여장(何如璋)을 만나 미국과의 조약 체결의 알선을 부탁했다. 일본 지도자들과 접촉한 뒤 12월 18일 부산을
알렌(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로 있으면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부상당한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조 광무제의 어의(御醫) 겸 정치 고문이 됐다. 1885년 광혜원(廣惠院)에서 의사와 교수로 일하다가, 1887년 참찬관(參贊官)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의 고문으로 도미(渡美), 조선에 대한 청(淸)의 불법적인 간섭을 미(美) 국무성에 알리고,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내한하여 외교 활동을 시작하고 1892년 한국휘보를 창간했다.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1886년 소학교 교사로 초청을 받고 D.A.벙커 등과 함께 내한(來韓)하여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1905년 을사늑약 늑결 직후 한국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여, 고조 광무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1906년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 행위를 폭로하는 한편, 1907년 고조 광무제에게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도록
신석우(申錫雨)는 1915년 총독부가 한일 강제 병합 5주년을 기념해 홍보 목적에서 개최한 시정5년 기념 물산공진회에 군산협찬회 상의원으로 참가했고, 같은 해 군산신사의 건축위원과 일본적십사자 특별사원을 맡았고 군산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 군산청년야학교 교장, 군산부 참사, 부 협의회원 등 지역 유지들이 거치는 직함을 갖고 활동했다. 공공사업에 기부하고 교육 사업에 매진하는 등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포상을 받았다.1920년 호남물산주식회사 취체역과 군산부 객주조합장, 1924년 호남물산 감사를 맡는 등 자본가로서도 왕성히 활동했으며, 1921년 한국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예직인 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발탁되었다. 민원식 주도의 신일본주의 단체 국민협회에 관계했고, 1929년 유교 계열의 친일단체인 대성원의 전북총지원장을 맡았다. 일본인이 1917년에 쓴 인물평에 따르면, 사회공익을 위해 개인 재산을 내놓는데 인색하지 않은 통 큰 인물이며, 한일 강제 병합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메이지 일왕을 숭앙하여 메이지 신궁 건설에 거액을 쾌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시문에도 능하여 1916년 일본적십자사 특별사원 자격으로 도쿄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했을 때 메
신헌(申櫶)은 182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에 임명된 이후 중화부사·전라도우수군절도사·전라도병마절도사·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했다. 1857년 좌승지·삼도수군통제사·형조 판서·한성부 판윤·공조 판서·우포도대장을 지냈다. 고조 광무제가 즉위한 후 흥선헌의대원왕의 신임을 얻어 형조·공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강화도를 수비했다. 1876년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구로다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했으며, 1882년에도 전권대관의 자격으로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국방책으로 정약용의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하여 민간 자위(自衛)에 입각한 민보방위체제를 주장했고,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서양식 근대무기를 수용하여 수뢰포(水雷砲)와 마반차(磨盤車) 등 신식무기를 제작했다.
오경석(吳慶錫)은 1853년(철종 4)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가 파견될 때 역관으로 베이징에 가서 11개월 동안 머물렀다. 서양열강들의 침략과 태평천국운동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중국의 상황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신서(新書)를 간행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1853~58년 4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중국의 개혁문제를 걱정하는 지식인들과 광범위하게 교제·토론하는 한편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 등의 신서를 구입·연구했다. 1860년 10월 진하 겸 사은사 신석우(申錫愚) 일행을 따라 역관으로 베이징에 갔다가 이듬해 3월에 귀국했는데,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사건으로 인한 중국의 대혼란과 위기를 체험했다. 1866년 5월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침공이 준비되자 조선정부가 사태를 해명하고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청국에 파견한 주청사(奏請使) 일행의 역관으로 다시 베이징에 가게 되었다. 이때 서양의 침략에 경험을 가진 중국의 정책가들을 방문하여 프랑스 함대의 동태와 그들의 조선침략 대책수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은 프랑스의 침공에 전혀 관계되어 있지 않으며 프랑스군은
박규수(朴珪壽)는 1861년 2차 아편전쟁 직후 영-프연합군 점령하의 청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사행(使行)을 지원하여 거대한 서양 세력을 목격했고, 중국 문인과의 교유를 통해 실학적 학풍을 다졌다. 귀국 후 대사성을 거쳐, 1862년 2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임명되어 국내현실의 모순을 처리했다. 1864년 고조 광무제 즉위 후 도승지·대사헌·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하고, 1865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66년 2월 평안도관찰사로 전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퇴시켰다. 1872년 강문형(姜文馨)·오경석(吳慶錫)을 대동한 2차 중국사행에서 서양침략에 대응하는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목격하고 개국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귀국 후 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면서 흥선헌의대원왕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자 1874년 9월 사직했다. 1875년 초 판중추부사가 된 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한거생활에 들어갔다. 그의 사랑방에 김윤식·김옥균·유길준·박영효 등 젊은 양반 자제들을 불러모아 연암집(燕巖集)·해국도지(海國圖志) 및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강의하여, 세계의 대세를 살피도록 하고 개화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