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李德懋)는 박제가(朴齊家)·류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내어 문명을 중국에까지 떨쳤다. 박지원(朴趾源)·박제가·홍대용(洪大容)·서이수(徐理修)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서건학(徐乾學) 등 중국 고증학파의 학문에 심취하여, 당대의 고증학자였던 이만운(李萬運)에게 지도를 받았다.1778년(정조 2)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으로 청의 연경(燕京)에 갔다. 기균(紀均)·당악우(唐樂宇)·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엄성(嚴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이헌교(李憲喬)·채증원(蔡曾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돌아올 때 산천·도리(道理)·궁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는 기록과 많은 고증학 관계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북학론 발전에 큰 보탬이 되었다. 1779년 박제가·류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外閣檢書官)이 되었다. 근면하고 시문에 능했던 이덕무는 규장각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하여 1781년 내각검서관(內閣檢書官)이 되었으며, 사도시주부·사근도찰방·광흥창주부·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규장각의 도서편찬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전회통·규장전운(奎章全韻)·기전고(箕田攷)·도서집성·국조보감·규장각지·홍문관지·검서청기(檢書廳記)·시관소전(詩觀小傳)·송사전(宋史筌) 등을 정리·교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