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굳이 아버지가 직접 가르치지 않았어도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는 "과정"(過庭)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곧 장마가 시작된다고 했다. 추적추적 대지를 적시던 가랑비가 곧장 소나기로 바뀌었다.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기 시작하는 굵은 빗속으로 고향 논두렁길을 달리던 어린 시절의 가슴아린 추억이 나타나 한바탕 난도질치고 갔다.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밖으로 뛰쳐나가 공지천에서 소양강 다리까지의 호수를 따라 아기자기하게 단장된 뚝방길을 내달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보폭을 넓히며 그 옛날 아버지의 발자국을 생각했다. 온몸에 때려오는 굵은 빗방울의 촉각이 무척 상쾌했다. 아직 어린 우리 형제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당신의 시골 고향인 붓당골 삼촌 집을 찾았다. 오래 전 할아버지께서 자리 잡았다는 그 곳 고향집을 작은삼촌이 계속 지키며 살고 계셨다. 일제시대를 지나고 한국전쟁을 치른 후 얼마 되지 않은 터인지라 세상살이가 무척 어려운 때였다. 생전 처음 와본 시골집에는 눈을 씻고 보아도 문명의 이기로 보이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쌀 닷 되를 주고 엊그제 매달았다고 하는 조그만 스피커 하나가 툇마루 나무기둥에서 삑삑거리고 있었다. 도시의 백열등 아래서 살아왔던 내게는 이러한 시골의 풍경들이 무척 신기하게 다가왔다. 처음 맡아보는 사랑방 석유등잔 타는 냄새에 잠을 뒤척이다보니 어느 새 아침이 되었다. 오줌이 마려워 바깥마당에 내려서니 땅이 푹푹 꺼졌다. 밤새도록 비가 온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삼촌께서는 두런두런 밤을 새우며 세상의 고달픔을 모두 아우르신 것 같이 안색이 초췌해 보였다. 잠결에 간간이 들은 이야기를 기억했다. “자네가 이 아이들을 한 이 삼 년 맡아 주어야겠네.” “형님, 저도 고만고만한 얘들이 다섯이예요. 속히 자리 잡고 데려 가셔야죠. 형수님이 돌아 가신지 얼마 안됐지만 그렇더라도 애들은 아버지 밑에서 커야 되지 않겠어요? 저 역시 천수답 몇 마지기로 살아갈 앞날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허어, 정말 사는 게 어렵긴 하겠네만 내가 배타고 멀리 나가면 도심 한복판에 이 어린 것들을 마냥 내 놓을 수는 없질 않은가? 한 이 삼 년이면 아이들끼리 밥이라도 해 먹을 수 있을 터이니 그때까지만 잘 부탁하네. 되는대로 아이들 생활비는 내 부쳐줄 터이니 그리 심려는 말게나.” “형님, 아버님 돌아 가신지도 며칠 안됐잖아요? 초상 치르느라 남은 곡식 다 바닥나 버렸어요. 지금 이 장마비와 보릿고개 넘어갈 생각을 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래, 보릿고개는 이걸루나마 어지간히 넘어갈 수 있을 걸세.” 하시며 삼촌의 넋두리에 준비하셨던 봉투를 하나 내 놓으신 게다. “고맙습니다. 형님, 큰 염려는 마시고 속히 자리 잡으시고 돌아오세요.” 아침을 드신 후 곧 돌아오마고 시골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굉장히 커 보였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만큼은 뭔지 모를 어수선한 내 마음을 안심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집 앞 논두렁길을 지나는 동안 아버지는 두어 번 뒤를 돌아다보시며 남겨두고 가는 우리 형제에게 슬그머니 웃음을 보이셨다. 그 웃음 속에는 오랜 세월 헤어져 있어야하는 이별의 슬픔과 사랑, 애정 이런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그래서 그때 그 웃음은 가장 존경스럽고 멋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으로서 평생 간직하고 갈 흑백 초상화로 마음속 깊이 남게 되었다. 아버지가 떠나시고 난 논두렁에는 보폭이 넓고 큼지막한 구두 발자국이 깊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버지의 발자국이었다. 곧 돌아오신다던 아버지는 며칠이 지나도 오시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발자국을 누가 밟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시 소나기가 오던 날, 굵은 빗방울 속으로 뛰어들어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뛰었다. 그 발자국은 내가 뛰기에 알맞은 간격으로 나 있었다. 뛰는 동안에도 온통 아버지 생각 밖에 나질 않았다. 온몸에 때리는 빗방울이 시원했다. 흠뻑 젖은 옷은 온통 흙탕물로 범벅이 되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숙모이신 작은 엄마께 엄청나게 혼이 났다. 얼마 전 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웠다. 엄마한테 혼나는 것은 그렇게 상처가 남지 않는다. 그 후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그 발자국만큼은 계속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물론 나 이외에 그 발자국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남겨주신 아버지의 유일한 선물이었기에 학교 길을 오가며 때마다 그 발자국을 보존하기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어느덧 여러 해가 지나 외항선 항해사이시던 아버지가 오랜 항해 끝에 우리 형제를 데리러 오신다고 했다. 동구 밖 논두렁길로 마중을 나간 나는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보이신 아버지께 쫓아가 꾸벅 절을 했다. 아버지는 밝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하얀 중절모를 쓴 멋진 신사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 그 동안 훌쩍 커 버린 우리 형제의 모습을 대견해 하시며 나를 덥석 안아 올리고 뺨을 마구 비벼대셨다. 따가운 수염에 쑥스러워진 마음은 아랑곳없이 이내 의기양양해진 나는 아버지보다 몇 걸음 앞서 성큼성큼 그 발자국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땅이 적당히 말라 있어 걷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흘끔흘끔 뒤돌아 볼 적마다 아버지께서도 내가 밝고 가는 그 발자국을 똑같이 디디고 따라오시며 웃음을 보이셨다. 앞선 내 발걸음의 의미를, 그 발자국 주인이 아버지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도, 내심 짐작을 하셨던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께서도 그 옛날 할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논두렁을 걸었던 기억이 분명히 있었으리라고 말이다. 장마에 세상이 눅눅해질 즈음 노인 몇 분을 모시고 점심대접을 하였다. 약주도 함께 권해드리며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님을 회상했다. 즐기시던 노인정 바둑도 뒤로하고 몸져누워 돌아가시기까지 1년 여 동안의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또 하나의 아버지의 발자국이다. 임종 직전, 무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짐작하고 숟가락에 소주 몇 방울을 따라 입에 넣어드리자 무척 만족한 표정을 보이셨다. 평소 즐겨하시던 약주를 들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마지막으로나마 약주를 한잔 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 살아 계신 동안의 효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과정록"(過庭錄)을 쓸 만큼 아버지의 가르침이 많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으로만 만들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한 삶 속에서 간간이 반추해왔던 "아버지의 발자국"과 같은 회상이야말로 나 뿐 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존재하고 있거나 앞으로 존재할 진정한 "과정록"이라 말하고 싶다. -홍다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