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의 하나인 보신각(普信閣)에서 파루(罷漏:오전 4시에 33번)와 인정(人定:오후 10시에 28번)에 종을 울려 도성(都城)의 출입시간을 알려주었다. 보신각 동종(普信閣 銅鍾)은 1985년까지 보신각(普信閣)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으며 조선 세조 14년(1468) 주조(鑄造)한 보신각 동종은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중요문화재이므로 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여 전시홍보하여야 한다. 보신각 동종은 돈의문(敦義門) 안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에 있는 신덕왕후의 원찰(願刹) 흥천사(興天寺)에 있었으나,흥천사가 폐사(廢寺)되자 원각사(圓覺寺)로 옮겨졌다.국가의 안녕과 국왕의 평강(平康)을 비는 원찰(願刹)·국찰(國刹) 원각사는 1467(세조 13)년 4월 초파일 10층석탑의 완공과 함께 낙성되었고 1488년(성종 19)에 화재로 소실되어 원각사지10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국보 2호)과 원각사 창건의 내력을 적은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보물 3호)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종루에 보관했으며 고조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普信閣) 편액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 동종이라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조 광무제는 황제권을 강화하고 통치권을 집중하는 데 목적을 두어 군제(軍制)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하였는데, 한성의 방비와 황제의 호위를 담당하는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호위대(扈衛隊)의 개편과 창설하였다. 황제가 육·해군을 친히 통솔하고, 국방·용병(用兵)·군사에 관한 각종 명령권과 군부 및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대한 지휘 감독권을 가진 원수부(元帥府)가 창설되었다. 또한 헌병대·포병·공병·치중병(輜重兵)·군악대에 대한 새로운 관제가 마련되었으며, 육군법률(陸軍法律)·육군법원(陸軍法院)·육군감옥(陸軍監獄) 등이 창설되었다. 지방군제 역시 전국의 지방군을 진위대(鎭衛隊)로 통합 개편하는 한편, 무관학교 관제(武官學校官制)를 새로이 반포하여 1898년 무관학교가 개교되었다.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제(大韓國制)가 반포되었고, 훈장제도(勳章制度)가 창설되었으며, 국가(國歌) 및 각종 기(旗) 등이 제정·발표되었다. 외국과의 통상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었으며, 북간도관리(北間島管理)를 설치하여 북간도의 대한국민을 보호하였다. 농상공부에서 주관하던 홍삼(紅蔘)의 제조 및 광산사업과 탁지부 주관의 둔토(屯土)가
시위대(侍衛隊)는 1895년(고조 32) 칙령(勅令) 120호의 반포에 따라 편성된 군대로 군부대신의 감독 아래 궁내의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그 편제는 1개 연대(2개 대대) ·1개 대대(2개 중대) ·1개 중대(3개 소대)로 하였으며 연대에는 연대장(副領)을 비롯, 대대장(參領) 2명, 부관(副官:副尉) 2명, 향관(餉官:正尉) 2명, 중대장(正尉) 4명, 소대장(副尉:參尉) 14명이 있었다. 양번(兩番)으로 나누어 매 3일마다 교대하여 궁내 시위를 담당하였으며, 군악대도 부설하였으나 창설 3개월 후인 8월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살해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고조 광무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중앙군(中央軍)을 러시아식으로 개편하면서 1897년(광무 1) 3월 시위대(侍衛隊)를 다시 설치하였다. 시위대는 총원 1,070명으로 200명을 1개 중대, 5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제하였는데, 대대본부에는 대대장 1명, 부관(부위) 1명, 향관(軍司) 1명, 정교(正校) 1명, 부교(副校) 1명을 두었으며, 중대에는 중대장 1명, 소대장 4명, 부교 ·참교 14명, 병졸 180명을 두었는데, 10월 1개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훙서(薨逝) 후에 묘호(廟號)가 올려진 조선의 추존(追尊) 왕은 모두 9명이다. 추존 왕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의 신분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아버지, 그리고 태조의 4대 선조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이다. 태묘(太廟)에 신위를 모셔서 왕위에 오른 왕과 똑같은 대우를 했다. 왕릉의 능제에 맞게 규모를 키우거나 석물을 추가하여 능도 더욱 위엄을 갖추게 되었다. 삼촌의 왕위를 계승한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은 세조의 맏아들로 의경세자에 봉해졌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20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예종 역시 1년 남짓한 재위 기간을 채운 뒤 병사하였다. 의경세자에게는 월산대군과 잘산군 두 아들이 있었는데, 대비는 둘째 아들인 잘산군으로 하여금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고, 그가 9대 왕인 성종이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뒤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1587년 정원군에 봉해졌으며,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지
유형(流刑)은 중죄를 범한 자를 먼 황무지와 도서지역으로 귀양보내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며 사형을 면한 정치범들이 유형으로 처벌되었고 왕의 사령(辭令) 또는 소결(疏決) 등의 어명에 의해서만 특별히 석방될 수 있었다. 부처(付處)나 안치(安置)는 활동범위를 일정한 구역으로 제한하는 형이며 천도는 죄인을 가족과 함께 국경지대로 이주시키는 형이다. 유형지에 처와 첩은 따라 가도록 하며 부모,조부모,자손은 따라 가기를 원할 때는 허락했다. 사형(死刑)은 3복제에 의하여 3차례의 재판을 거쳐 신중을 기하도록 하였고, 사형의 확정은 반드시 왕의 재결을 받아야만 하였고 특별히 사형을 집행하지 못하는 금형일을 법으로 제정했다. 사형에는 대시집행과 불대시집행이 있는데, 대시집행은 사형이 확정된 후 일정기간 대기하였다가 추분 이후부터 입춘 이전에 날짜를 정하여 사형을 집행하는 것으로 일반 사형수에게 적용하였으며 불대시집행은 사형이 확정되면 즉시 사형을 집행하는 것으로 보통 10악의 범죄에 적용됐다. 사형의 집행방법은 밧줄로 목을 매어 달아 죽이는 교형(絞刑)과 목을 잘라 죽이는 참형(斬刑), 능지처사(陵遲處死)로 나누어 지고 능지처사는 대역사건의 국사범을
조선 세종 1443년 창제되어 1446년 10월 상순에 반포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며 오늘날에는 한글이라고 한다. 훈민정음은 한 음절을 초성·중성 종성으로 나누는 음소문자(音素文字)이며 음절단위로 적는 음절문자이다. 창제 당시는 초성 17자, 중성 11자로 모두 28자였으나 오늘날에는 24자만 쓰인다. 세종(世宗)은 중국 글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적고 있으나 이는 우리말을 적는 데 맞지 않으므로 우리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백성들을 위해 배우기 쉬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했다.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고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 학사들은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했다. 책이름을 글자이름과 똑같이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며 총 33장 3부로 나누어, 1부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2부는 훈민정음 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3부
1873년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내탕금(內帑金)을 들여 경복궁(景福宮) 북편에 정치적 독립 의지를 드러낸 건청궁(乾淸宮)을 짓기 시작하며 흥선헌의대원왕의 섭정(攝政)을 종식하고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는데, 근대 문물,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외교통상정책으로 전환하였으며 고조 광무제는 1884년부터 건청궁에서 임어(臨御)하면서 정무를 처리했다. 1887년 건청궁에 최초로 전등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중국,일본보다 2년 앞선 것이다.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도모한 건청궁(乾淸宮)은 크게 장안당(長安堂)·곤녕합(坤寧閤)·복수당(福綏堂)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장안당 서쪽에는 각감청(閣監廳)이 있고, 남쪽에는 연못, 섬과 향원정(香遠亭)이 있다. 고조의 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齎)는 중국식 벽돌로 지어졌으며, 장안당 뒤쪽의 서양식 건축 관문각(觀文閣)은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삼국간섭(1895) 이후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명성황후(明成皇后)는 친러·친미 정책을 추진하여 10월 민영환(閔泳煥)을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하고 미군 장교 다이가 훈련시킨 시위대(侍衛隊)를 중용하며 친러계 이범진(李範晉)
어보(御寶)는 왕위 계승,권력 이양, 책봉(冊封)·존숭(尊崇)·추숭(追崇), 외교 문서, 행정, 서적 반사(頒賜)의 의례에 사용하였으며 왕권을 상징하고 제왕(帝王)의 권위와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제작한 인장(印章)이다.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인장(印章)은 원래 새(璽)와 보(寶)가 있는데 중국의 제후국 조선의 어보(御寶)는 새(璽)를 쓰지 않고 보(寶)와 인(印)을 사용하였으며 1897년 대한제국(Daehan Empire)이 건국되고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를 제작하면서 어보(御寶)에 새(璽)가 사용되었다. 조선의 어보는 크게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국새인 대보(大寶), 어명의 발동을 위한 행정 절차에 사용된 어보, 각종 의례에 사용된 어보로 나누어지는데 대보(大寶)는 국가를 상징하고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왕위계승이나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였다. 조선은 국왕의 즉위나 왕세자 책봉의 경우 중국의 승인을 받았는데 중국은 임명장에 해당하는 고명(誥命)과 함께 도금(鍍金) 인장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보내고 조선은 이 인장을 국가와 제왕을 상징하는 대보(大寶), 즉 국새(國璽)로 사용하였다. 세종 대부터 중국이 보내온 국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황제위에 등극하기 전 대신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국호를 의논하고 제후국에서 황제국(皇帝國)으로 국격이 격상되어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며 모든 예가 다 새로워졌으니 환구단에 첫 제사를 지내는 지금부터 새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하며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고구려,백제,신라)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고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므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三代) 이래로 황제(皇帝)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고 조선은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大韓:COREA)이란 이름은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쓴 적이 없고 한(韓)이란 이름은 고유한 우리나라의 이름이며, 고구려, 백제,신라의 삼한(三韓)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니 대한(大韓)을 국호로 한다.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정해져 환구단에서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대한(大韓)’으로 썼다. 단군(檀君) 이래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신라의 삼한(三韓)을
태묘(太廟) 신주(神主)에 훙서(薨逝)한 조선 국왕,붕어(崩御)한 대한제국 황제는 묘호(廟號), 시호(諡號), 존호(尊號)를, 왕후는 휘호(徽號)를 제주(題主)하였는데 조선왕조는 명(明)국의 제후국(諸侯國)으로, 조선 국왕이 훙서(薨逝)하면 명국에 청시(請諡)하여 사시를 받고 나서 제주하였다. 태조부터 인조의 아버지 원종까지 신주는 먼저 명나라의 사시(賜諡)를 쓰고 다음에 조선의 묘호, 시호, 존호를 썼고 인조부터는 조선의 묘호, 시호, 존호만 썼다. 묘호(廟號)는 글자 그대로 태묘(太廟) 신주(神主)의 이름 즉, 조(祖)와 종(宗)을 말하며 조(祖)와 종(宗)은 유공왈조(有功曰祖) 유덕왈종(有德曰宗)으로 이는 조선 1대 태조- 25대 철종과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2대 순종 융희제(純宗 隆熙帝)까지 적용되었다. 조(祖)는 태조,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순조,고조 광무제 등 건국 또는 큰 정치적 업적을 남긴 왕,황제에게, 종(宗)은 치적(治積)을 계승하고 덕이 많은 왕,황제에게 붙여졌다. 시호(諡號)는 생전에 행한 업적이므로 대행(大行)이 있는 분은 대명(大名)을 받고, 세행(細行)이 있는 분은 소명(小名)을 받는다. 대왕이 8자, 왕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