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Horace Newton Allen)은 1884년 주한 미국공사관 소속 의사로 있으면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부상당한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조 광무제의 어의(御醫) 겸 정치 고문이 됐다. 1885년 광혜원(廣惠院)에서 의사와 교수로 일하다가, 1887년 참찬관(參贊官)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의 고문으로 도미(渡美), 조선에 대한 청(淸)의 불법적인 간섭을 미(美) 국무성에 알리고,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내한하여 외교 활동을 시작하고 1892년 한국휘보를 창간했다.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1886년 소학교 교사로 초청을 받고 D.A.벙커 등과 함께 내한(來韓)하여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1905년 을사늑약 늑결 직후 한국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여, 고조 광무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1906년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 탄압 행위를 폭로하는 한편, 1907년 고조 광무제에게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도록
소현세자(昭顯世子)는 1625년(인조 3) 세자로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주에 내려가 남도(南道)의 민심을 수습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함께 인질로 청나라 선양에 가서 9년간 머무르는 동안 양국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했다. 1644년 9월 명나라를 정벌하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베이징에 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J. 아담 샬에게 천주교와 서양 과학문명을 배워,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을 가져 왔다. 1645년 2월 18일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조정은 서인들이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소현세자의 태도에 부정적이었고, 인조도 소현세자의 선양에서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또한 세자빈 민회빈(愍懷嬪)과 관계가 좋지 않던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이 여러 가지로 소현세자를 모함했다.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急死)하였고 시신의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어 민회빈(愍懷嬪)과 여러
양녕대군(讓寧大君)은 1402년(태종 2) 원자(元子)로 봉해졌으며, 140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09년 이후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일정한 범위 내에서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나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세자로 책봉된 직후부터 학문에 게으르고 무절제하다고 하여 태종에게 지적을 받았으며, 나이가 들면서 방종이 더욱 심해져, 태학(怠學)·정강(停講)이 계속되었다. 또한 매와 개 등 완물(玩物)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군소배들과 어울려 세자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 1417년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봄으로써 더 큰 불신을 받게 되었으며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도록 권하고 벌을 주기도 했지만 끝내 이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1418년 5월 류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어 동생인 충녕대군(忠寧大君 : 世宗)에게 왕세자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그후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으며, 세종과 돈독한 우애를 유지하여 여러 차례 탄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배려로 무사했으며 시와 글씨에 매우 뛰어났다.
정종은 1377년 아버지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했고, 1389년 절제사 류만수(柳曼殊) 밑에서 해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다. 1390년 밀직부사(密直副使)·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삼사우사(三司右使)를 역임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지고,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李芳遠)의 영향력 아래에서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399년(정종 1) 3월에 개경으로 천도했고, 집현전을 설치했다. 그해 8월 분경금지법(奔競禁止法)을 제정하여 권귀(權貴)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1400년 2월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아우 방원을 세제(世弟)로 책봉했다. 그해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다.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 분리체제를 이룩했다. 6월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했다.
연조는 폐비 윤씨가 사사(賜死)된 뒤인 1483년(성종 14)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자 시절 허침(許琛)·조지서(趙之瑞)·서거정(徐居正)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사창(社倉)·상평창(常平倉)·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는 등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시켰으며, 경상우도지도(慶尙右道地圖)·국조보감(國朝寶鑑)·동국명가집(東國名歌集) 등을 간행하고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帝王詩文雜著)·여지승람(輿地勝覽)을 완성했다.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키는 등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제도를 크게 위축시켰다.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둘째 아들 중종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은 선조가 임진왜란중에 세자로 책봉한 광조는 적장자가 아니며 명(明)의 책봉도 받지 못했다는 명분상의 약점이 있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류영경(柳永慶) 등의 척신과 소북(小北) 세력이 세자의 개봉(改封)을 건의했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임종 전에 류영경·한흥인(韓興寅)·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 등 7대신에게 영창대군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1608년 광조가 즉위한 뒤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정권(大北政權)은 임해군(臨海君)을 살해하고 류영경 등을 파면시켰으며, 왕권을 위협하는 첫번째 인물로 영창대군을 지목했다. 1613년 강변칠우(江邊七友)의 은상(銀商)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이이첨은 박응서(朴應犀) 등을 사주하여 강변칠우들이 은을 모아 김제남을 영입하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하여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7대신들도 처벌당했으며,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곽재우(郭再祐) 등이 혈육간의 정분과 연소함을 들어 전은(全恩)의 논리를 폈으나, 대북세력의 다수는 토역(討逆)의 논리를 내세워 죽일 것을 주장했다. 이항복 등이
러시아는 1903년 4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만한교환(滿韓交換)의 원칙으로 수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더이상 협상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결의했다.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운이 감돌자, 대한제국 정부는 1904년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대(對)러 교섭 단절과 아울러 개전을 결정했다. 2월 8일 뤼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파괴하고, 2월 9일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한성에 진주했다. 2월 10일 선전포고를 했으며 2월 23일 일본은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고, 병력과 군수품의 수송을 위해 경부·경의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4월 1일 한국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5월 18일 대한제국 정부에 러시아와 체결했던 모든 조약과 러시아인에게 부여했던 모든 이권의 폐기,취소를 공포하게 했다. 일본군은 5월초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九連城)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다음 요양으로 향했다. 요양에서 8월 28일부터 일본군 13만여 명과 러시아군 22만 명 간에 대격전이 벌어졌으나, 9월 4일 일본군은 펑톈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여세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기 위하여 1905년 11월 9일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파견하여 동양의 평화를 구실삼아 을사늑약의 늑결을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했다. 11월 17일 불법 늑결된 을사늑약에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행사의 주체가 통감이라고 규정했다.1905년 11월 22일 통감부 및 이사청 설치가 발표되었는데, 통감부를 한성에, 이사청을 한성·인천·부산·원산·진남포·목포·마산에 두어 을사늑약에 의한 여러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고 당분간 통감부와 이사청의 업무를 일본 대사관과 영사관에서 집행하게 되었다. 12월 20일 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가 반포되었다. 한국 한성에 통감부를 두고 통감부에는 통감을 두는데, 통감은 일왕에 직속하고 외교는 일본 외무대신을 거쳐 내각 총리대신을, 기타 사무는 내각 총리대신을 거쳐 상주하고 재가를 받게 되었다. 통감은 대한제국의 외국 영사관 및 외국인에 관한 사무를 통할하고 일본관리 및 관청이 시행하는 업무를 감독하는 지위였다. 한국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한국 수비군 사령관에 대하여 병력 사용을 명령할 수 있었다. 1906년(광무 10) 2월 1일 통감부가 설치되어 개청
1905년 11월 9일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한성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10일 고조 광무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고조 광무제에게 을사늑약안을 제시하면서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받아 궁궐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고조 광무제는 이토 히로부미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무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이토 히로부미는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沈相薰)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자 1860년대 이후 남하정책을 추진한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은 조선 왕실에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고 친일개화파 정권에 의해 눌려 있던 명성황후 세력과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사 K. 베베르는 미국 공사와 함께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을 권유했다. 이에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 건청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여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했고 친일 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의 실시를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을 재개했다. 그러나 명성황후 살해와 단발령은 반일 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을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친미·친러 세력은 새 정권을 세우고자 1895년 10월 12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친미파였던 이완용·이윤용 등과 모의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