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당 지지도 상승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민주통합당 지도부가 벌써 샴페인 터뜨리는 분위기가 감지되는게 아니냐는 정치권 주변의 우려에 대해 김정길 민주통합당 부산진(을) 후보가 작심을 한 듯 지난 27일 트위터를 통해 지도부의 최근 행보에 쓴 소리를 쏟아내는 등 야권 단일화 등 당 지도부 행보에 대한 마찰음이 나타나고 있다. 야권후보 단일화의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한나라당과의 석패율제 협상과 새 지도부의 명분없는 인사 등의 행보들은 오는 4월 총선에서 다수당을 노리는 민주통합당에 악재가 된다는 것이 일관된 평가이다. 야권 후보 단일화와 관련, 김정길 후보는 이날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민주통합당 지도부가 착시 선거 현장을 모르는 무지”라며 “민주통합당이 높은 지지율로 일찍 삼페인을 터트리고 있다.” 면서 “4월 총선은 51:49의 싸움 이며 야권 단일화가 절실하다”며 민주통합당, 정신 차려라“고 지도부의 행보에 강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김정길 후보는 또 ”이번 총선 프레임은 MB심판“이라며 ”지금 민주통합당에 필요한건 야권 후보 단일화“이고 이러다가 잘못하면 민주통합당도 한방에 간다.고 꼬집었다. 김정길 후보의 이같은 쓴소리는 한나라
최현배(崔鉉培)는 1910년 5월부터 3년간 매주 일요일에 개최한 주시경(周時經)의 강습원(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배우고 독립사상을 고취받았다. 1925년에 일본 경도(京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졸업하고, 1926년 동 대학원에 수학하는 중 조선민족갱생(更生)의 도(道)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서 한국민족이 다시 독립하는 방도가 다각적으로 연구되었다.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1937년까지 재직하다가 1938년 2월에 안재홍(安在鴻) 등 기독교 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단체인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의 독립사상 고취운동으로 일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연희전문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되었다. 한글 연구에 정진하여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에 가입해서 1929년 107명으로 구성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漁辭典編纂會)에 참가했으며, 1934년 4월에 중등 조선말본을 간행하였다. 흥업구락부운동으로 실직된 기간에 한글 연구에 더욱 집중하여 1941년 그의 대표작 한글갈을 완성해서 간행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바로 재벌들의 문어발식 서민경제 죽이는것을 제한하기 위해 ‘출자총액제한’하겠다는 것을 발표했다.그때는 언론들 어디 먼 나라라도 갔다왔는가?뒤늦게 재벌들 순대,떡볶기장사하는것을 마치 특종인양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솔직히 언론이라는 것이 국민을 위해 하는 일이 뭔가?언론들이 재벌들 자회사 밀어주기,골목상권까지 싹쓸이하는것이 어제 오늘일도 아닌데, 몰랐다고 호들값떨고 있는데...그런 언론 국민들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국민생활 고통지수도 모르면서 무슨 대한민국 대표언론이라고 포털에다 대고 떠드는가?한번 네이버나 각포털에 가보라 소위 우파라고 하던 언론들 어떤 기사들이 올라왔는가? 한가지 예로 ‘한나라당 살생부’ 개코같이 내용도 없어요.그런데 네이버라는곳도 희안하게 ‘데일리안’ ‘뉴시스’ ‘국민일보’등등 다 같은 기사를 제목만 살짝바꿔 조회수만 올리고 보자...고?이러니 대한민국에 상식을 지키고, 예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살겠는가?언론들이 앞장서서 대한민국을 아예 망가트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직하게 우파언론이라면서...혹 무늬만 우파언론 아닌가?민통당인가? 뭔가? 문재인 띄우기에 아예 혈안이되서...박근혜 까대기에
주시경(周時經)은 배재학당 시절 독립신문사에서 서재필의 언문조필로 있으면서 철자법을 통일할 목적으로 1896년 국문동식회를 신문사 안에 설립했다.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4개월간 활동했으며, 같은 해 7월 학부 내의 국문연구소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어 3년 동안 국문연구안을 작성·제출·토의했다. 상동청년학원 안에 개설된 하기(夏期)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유지들을 규합하여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한 후 2년 동안 이끌었다. 국어연구학회는 1911년 조선언문회(배달말글몯음)로, 강습소는 조선어강습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913년 학회의 이름이 한글모로, 1914년 조선어강습원의 이름이 한글배곧으로 다시 바뀌었다. 주시경은 1909년에는 J.S.게일, 다카하시 등과 더불어 한어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이화학당·흥화학교·기호학교·융희학교·중앙학교·휘문의숙·배재학당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과 여러 강습소를 중심으로 국어(國語) 강의를 전개했다. 1900년 상동사립학숙(尙洞私立學塾)에 국어문법과를 부설하고 1907년 여름에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국어강습소, 같은 해 11월 같은 학원에 설치된
정환직(鄭煥直)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이 되어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으며, 그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로 황해도에 가서 광부들을 거느리고 구월산 일대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에서 일본군의 힘을 빌리려 하자 일병의뢰반대소(日兵依賴反對疏)를 올려 그 부당성을 통박했다. 1897년 태의원별입시(太醫院別入侍)가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사 겸 토포사로 나가 치안을 확립했으며, 이어 시종관이 되었는데 그해 11월 태묘(太廟)에 불이 나자 고조 광무제를 업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고조 광무제의 신임을 받았다. 1900년 도찰사가 되어 부패한 경주부윤을 파면했다가 모함으로 옥고를 치렀으나, 풀려난 뒤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늑결되자 고조 광무제의 밀지를 받고 한성에 머물러 있으면서 격문을 붙여 반일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군자금을 조달했다. 정용기는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1906년 3월 600여 명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켰다. 정용기가 1907년 4월 산남의진을 재건하여 영천·경주·청하·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위세를
2012년 임진년, 용의 해에 걸맞게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용틀림을 하느라 분주하다. 또한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공천개혁이니 쇄신이니 하면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유혹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들만의 이익과 권력 창출을 위한 귾임없는 정쟁에 빠져있다. 이러한 가운데 국민들은 물가 불안, 생활고 불안, 취업 불안, 더나아가서는 예측할 수 없는 남북관계 등 불안함과 무기력함을 달래며 성난 민심은 4월11일을 향하여 분노가 뒤 섞인 거친 숨을 내쉬며 멈출 줄 모르고 달리고 있다. 그것도 전국의 시선이 집중된 4월 총선 최대 격전지 부산은 역대 그 어느 선거 때 보다 그 결과에 따라 정치 지형을 바꿀 핵이 내장된 곳이다.어쩌면 이번 총선 결과에 따라 올 대선 승패의 전진기지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민주통합당으로선 모든 것을 걸고 한판 승부를 펼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민주통합당 입장에서는 적어도 4∼6석은 얻어야 그 여세를 몰아 대선까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진원지와 중심에서 진검 승부를 겨룰 용장들이 소히 말하는 서부산 벨트의 문재인(사상구), 문성근(북강서을)이 낙동강에
전명운(田明雲)은 1908년 3월 20일 대한제국 정부 외국인 고문인 친일파 미국인 D. W.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기자들과 만나 친일발언을 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공동회를 개최하여 4인의 총대(總代)를 뽑아 스티븐스에게 항의했으나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그를 구타했다. 전명운은 스티븐스를 저격하기로 마음먹고, 1908년 3월 23일 오전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려고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페리 정거장에 도착한 스티븐스가 일본 총영사와 차에서 내리는 순간 앞으로 다가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었다. 스티븐스가 전명운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뒤에 있던 장인환(張仁煥)이 3발을 쏘았다. 1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으나 2발은 스티븐스의 허파와 허리에 명중시켰다. 총을 맞은 전명운은 병원에 실려갔고, 장인환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스티븐스는 3월 25일 죽고, 전명운은 퇴원한 뒤 구속되었다. 미주 내 한인사회는 스티븐스 저격 의거를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을 규탄하고 나아가 국권회복운동의 전기로 삼았으며,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공립협회(共立協會)는 재판비용을 모금해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투쟁을 했으며 재판 결과 무죄로 풀려났다.
이종일(李鍾一)은 1882년 2월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수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같은 해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다. 1894년 보성보통학교(普成普通學校) 교장이 되었으며, 이후 경성시내의 7개 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896년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했고, 1898년에는 청년애국회에 관여하는 한편, 2월에는 류영석(柳永錫) 등과 함께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대한제국민력회는 독립협회가 해산되면 그 이념과 사상을 계승할 것을 확인했으며, 주말마다 실학사상·동학사상·동학교리 등을 강의했다. 러시아 세력의 침투 배격과 이권 수호를 주제로 한 만민공동회에 참가하여 국권수호와 이권의 양여 반대를 주장했다. 1898년 3월에는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경성신문을 창간했으며, 8월에는 순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제국신문은 독립협회 여성회원들의 홍보지로서 민권운동과 여성의 사회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황성신문·만세보와 대한협회의 기관지인 대한민보 등에도 관여했다.1905년 12월 최학래(崔鶴來)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는데 손병희(孫秉熙)와는 이미 1898년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은찬(李殷瓚)은 1907년 고조 광무제가 강제 퇴위를 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그해 9월 이구재(李九載)와 함께 기의하여 원주 일대에서 활약했다. 의병 500여 명을 모은 뒤, 경북 문경으로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의병의 총대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이인영의 승낙을 얻어낸 후 원주로 돌아와 사방으로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하고 한성 진공을 위해 양주(楊州) 집결을 전국의 의병들에게 촉구했다. 이에 호응하여 양주에 모인 의병들로 13도의병연합부대가 편성되자,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인 이인영의 중군(中軍)이 되었다. 1908년 1월 일본군의 공격으로 흥인지문 밖 30리 지점에서 퇴각하면서 한성진공작전은 실패했다. 그뒤 소속부대를 이끌고 양주 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허위(許蔿)의 의병부대에 합류, 임진강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고 허위를 총대장에 추대한 뒤 활동했다. 1908년 말 허위와 농민출신 의병장 김수민(金秀敏)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하자 잔여부대를 이끌고 양주·포천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기습공격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1909년 1월 중순 일본군의 탄압이 본격화되자 부대원을 이끌고 연평도의 일본군 기습대를 공격하는
오화영(吳華英)은 1919년 2월 17일 박희도(朴熙道)를 만나 기독교의 독립운동 참여를 논의하고 이튿날 박희도·이승훈(李昇薰) 등을 만나 기독교에서도 일본 정부와 총독부에 청원서를 내고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여, 개성지방의 책임을 맡았다. 2월 27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다음날 인쇄된 독립선언서 500여 장을 개성의 강조원(姜助遠)과 원산의 곽명리(郭明理)에게 전달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泰和館)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한용운(韓龍雲)의 간단한 식사를 듣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복역중이던 1920년 부인 이명희(李明姬)도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고 독립신문을 배포한 대한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신앙부흥운동과 민족정신 함양에 힘썼다. 1923년 1월 유진태(兪鎭泰)·이종린(李鍾麟)·백관수(白寬洙)·정노식(鄭魯湜) 등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 발기준비회에 참여하여, 2월 3일 천도교당에서 물산장려에 관한 대중강연을 했다. 1926년 11월 명제세(明濟世)·최익환(崔益煥)·권태석(權泰錫) 등이 발기한 민족단일전선 조직